2012. 10. 2. 화


'과연 달팽이들이 맥주에 모여들었을까?' 

아침부터 우리 부부의 관심사는 텃밭에 가 있었다. 어젯밤 설치해 둔 '맥주와 담뱃재'의 콤비가 우리의 골칫거리인 달팽이들을 모두 다는 아니더라도 제법 해결해 주었기를 기대하며 텃밭으로 향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뿌연 맥주 속에 보이는 달팽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우리의 상추와 브로콜리들은 더욱 초췌해 보였다. 조심스레 상추밭을 들여다 보니 뭔가 이상해 보였다. 이럴수가! "이건 달팽이가 아니라 뭔가가 뜯어 먹은 자국 같은데." 순간 머릿속으로 며칠 전 아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상추 밭에 짐승 발자국들이 있더라구……"

"수도 꼭지 옆에 너구리가……"


짧은 순간에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너구리다! 너구리였다! 좀더 자세 살펴보니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상추 잎이 거의 없다. 아무래도 그동안 계속해서 너구리의 야참거리가 되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 상추밭은 너구리의 '야간 매점'이었다. 어쩐지 그동안 상추가 거의 크지 않는다 싶었다. 잎모양도 조금 이상했는데 어려서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너구리가 특히 상추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작물들보다 상추가 거의 아작나다시피했는데, 지금까지 매일 보면서도 그걸 몰랐다. 참 경험 없고 센스 없는 농부들이다. 다른 작물들도 돌아 보니 옥수수도 하나 도둑 맞았다. 이번에도 역시 너구리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아내와 나는 큰 허탈감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잡식성인 너구리가 범인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너구리를 막을 수 있는 도움되는 정보는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작물들이 잘 자라준다고 해도 도둑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밤을 새서 밭을 지킬 수도 없고 …… 농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단 울타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울타리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재료도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상추를 심어 놓은 이랑 주변만 울타리를 세워 보기로 했다. 뜨거운 해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오후 다시 밭으로 나갔다. 엉성하지만 기둥들을 세우고, 줄로 잇고, 밭 한쪽을 상당히 침범한 블랙베리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바리케이트를 쳤다. 너구리가 울타리를 힘으로 밀고 들어오거나 잔잔한 가시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았다. 그래도 안 되면 농사를 접기로 했다.


문득 아가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느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서 2:15)


이 비유에서 '작은 여우'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실감이 난다. 며칠 전 제법 어두워졌을 무렵 아내가 수도 꼭지 옆에서 봤다고 하던 너구리, 그 녀석이 우리를 이렇게 허탈하게 만들 줄을 몰랐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다. 우리의 가정에, 교회에, 모임에, 그리고 넓게는 나라에, 이처럼 사소하게 여기고 방치하는 '작은 여우'가 또는 '작은 너구리'가 가정과 교회와 모임과 나라를 온통 헤집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다.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 주위를 맴돌며 밤을 기다리는 너구리는 없는가?



'날적이 > 원예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예 일기 7 : 노동  (0) 2012.10.10
원예 일기 5 : 손님과 달팽이  (0) 2012.10.08
원예 일기 4 :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  (0) 2012.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