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 수.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늦게 잠이 들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작년, 그래 이제는 작년, 연말에 K님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있었는데 연말에 너무 바쁘고 분주하여 이메일 속에 넣어 두고 꺼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K님을 꿈에서 만나고, 아직 그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놀라서 잠이 깨었다. 이렇게 작년의 그림자 속에서 새해 첫 아침을 맞았다. 그래, 지나간 날들에 매여 있어서도 안 되지만, 지나간 날들로부터 나를 끊어 버릴 수도 없는 법이니까. 이 묘한 관계.


   침대를 내려와 묵상지를 들고 의자에 앉았는데, 이번에도 예상과 달리, 오늘 아침은 어딘가 모르게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년 연말 늘 맞던 아침들과는 다른 아침. 이 느낌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하는데 마침 아침 여덟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닫힌 창을 지나 들려왔다. 마음 깊숙이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 그 소리가 아직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내 영혼을 권하는 듯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며. 마치 어느 수도원에서 아침을 맞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종소리와 함께 며칠 전 '산책길'에 썼던 새해 인사글이 떠올랐다.


어제는 어둡고, 힘들고, 암울한 날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괴로움 뒤에 결국에는 희망과 위로 가운데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고, 빗속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잠을 깨었다. 그것은 새해의 첫 소리였다.

- 1967년 1월 1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일기 중에서 

지난 한 해가 어둡고, 암울하며, 힘든 날들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의 위로 가운데 편안히 잠자리에 드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새해에 여러분의 마음에 울리는 첫 소리가 희망이기를 바랍니다.


종소리 자체가 희망이거나 희망의 상징인 것은 않지만, 그리고 오늘 아침 울린 종소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한 순간이지만, 그 종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리는 경험은 먼지처럼 가라 앉은 희망을 다시 공기 속으로 띄워 놓았다. 그리고 말씀을 읽는데, 바울이 우리의 희망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내용과, '청결한 마음'이란 말이 눈에 들어 온다. 내가 주님의 종으로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희망 때문이다. 희망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런데 난 적어도 지난 몇 개월 동안 그 희망이 상처 입은 채 살아 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고 있다.


'청결한 마음'이란 말에 '마음의 순수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였던 사막과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떠올랐다. 올 한 해, 이 청결한 마음 갖기를 더욱 바래야 하지 않을까? 공부와 관련해서는 이러저러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의 순수함을 얻기 위해 내 삶을 질서 있게 정리하고, 주께 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그 청결한 마음을 얻기 위해 올 한 해 또 얼마나 힘겹게 사막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좀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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