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찾아오시는 선생님




동료들과 함께 모임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같은 학교를 졸업한 네 사람이 함께 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퇴근 시간, 차가 밀려 거북이걸음을 하는 동안 차 안의 대화는 자연스레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네 사람이 다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화제가 된 선생님들이 학교에 제법 오래 계신 분들이어서 우린 서로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며 추억에 잠기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들은 학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형성하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생님들은 역사 속의 어떤 시기를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황선생님〉이라는 시에는 ‘선생님이라는 역사’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황선생님 


사월 그날이 오면 마당조회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혁명공약 몇 줄이 

책의 등짝마다 낙인처럼 박혀 나오던 시절인데 

까까머리들 모아놓고 

교장 선생님은 황선생님을 조회단에 부르셨다.

대학 다니시던 때 맨주먹 총부리에 까이우며

몸 분지른 선생님이라 하셨다.

우리가 다니던 그 학교 울타리엔

유독 버드나무가 많았고

버드나무처럼 몸이 가는 황선생님은

조회단에 오르셔서 느리고 느린 사투리로

차돌만하게 보이는 주먹을 들고

몇 번인가 자유라는 말씀을 하셨고

운동장 조회가 끝나고 사회 시간이 되어서도 

한 시간 내내 그 말씀만 더 하시곤 했다. 

그때 우리를 가르치시던 그 많은 선생님들이

교장이 되고 교육장이 되고 무엇이 되었다는데

누구도 황선생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던 

황선생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아득히 살아

자라서 우리가 선생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정성스레 교실문을 열며

굳고 단단한 몇 개의 글자 위해 몸 깎다

백묵처럼 부러지고 싶을 때

황선생님은 눈록색 버들잎 주렁주렁 흔들며

아침 안개 엉긴 창 안을 기웃대고 계셨다.

해마다 사월 명지바람 부는 때

버드나무잎으로 흔들리고 계셨다.


-〈황선생님〉 전문


      이 작품은 도종환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에 실려 있습니다. 이 시집의 후기에서 시인은 역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황선생님〉의 본문에서 “사월 그날”이란 4·19 혁명이 일어났던 4월 19일을 말하고, 책의 등짝에 찍혀 나오던 “혁명공약”은 ‘혁명’이란 이름으로 4·19 혁명의 열매를 물거품처럼 만든 5·16 군사정변을 선전하는 문구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사 정권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던 엄혹한 시절에 조회단과 교실에서 차돌같이 조그맣지만 단단한 주먹을 들고 “자유”를 이야기한 황 선생님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학 시절 “맨주먹 총부리에 까이우며 / 몸 분지른 선생님”이 굵고 튼튼한 나무가 아니라 가는 버드나무, 그것도 사월의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초록의 버드나무에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시인이 다니던 학교 울타리에 유독 버드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황 선생님’과 ‘버드나무’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결합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진한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군홧발로 자유를 짓밟은 ‘혁명군’과 대비되는 인간적인 이미지로 황 선생님을 그려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비록 황 선생님을 아는 그 시기의 다른 선생님들은 교장이나 교육장이나 그 어떤 높은 지위에 올라도 황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는 학생들의 뇌리에, 최소한 자라서 교사가 된 제자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된 제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정성스레 교실문을 열며 / 굳고 단단한 몇 개의 글자 위해 몸 깎다 / 백묵처럼 부러지고 싶을 때”, 황 선생님은 사월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잎사귀들 속에서 나타나 창 안을 기웃대며 제자들을 격려합니다. 이렇게 황 선생님은 시적 화자의 과거 기억 속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늘도 명지바람과 함께 그를 찾아옵니다. 살아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생님, 특히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들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월이 되니 이런 선생님들이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집니다. 선생님들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오히려 선생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Magazine Hub 61 (2018년 5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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