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11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의 사역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외부의 박해는 물론, 내부의 비판도 그가 사도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바울이 가진 사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9장에서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매우 당당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자신에게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으며, 또한 성도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마땅한 권리가 있지만, 그것이 혹시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가 될까 하여 그 모든 권리들을 내려놓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일을 해서 비용을 충당하고, 자신의 몸을 치면서까지 모든 일에 자신을 절제하였습니다.

이어서 10장 전반부에서는 우상 숭배음행주를 시험하는 것원망하는 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와 도덕적 방탕함의 문제는 옳음과 그름이 흑과 백처럼 명백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10장 후반부에 담긴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또한, 11장에 담긴 여자와 남자의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문제는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침들입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상황 속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분별하고 판단할 기준이나 근거는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1023절과 24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거나 유익한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보다 궁극적인 원칙으로 모아집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말로써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일에 스스로를 절제함으로써 이 원칙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자신 있게 호소합니다.

마지막으로 11장 후반부에는 주의 만찬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찬은 모든 교인들이 한 몸과 한 피에 참예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방편이 되어야 하지만,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오히려 성찬의 원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찬이 분쟁과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일도, 거룩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속된 일이 되고 맙니다. 이제 9장부터 11장까지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20171125

고린도전서 1-4

 

오늘부터 고린도전서를 읽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고린도 사람들은 제멋대로 굴고, 독주를 마시고, 성적으로 문란한 무리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메시지를 가지고 고린도에 도착하자,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들러붙은 평판까지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지요.” 그래서 바울이 16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다가 고린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자, 고린도 교인들도 복음의 핵심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때로는 엄한 책망으로, 때로는 다정한 권면으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본받아(4: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서 있으라 권면합니다(1:8).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옛 성품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그것들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나에게도 여전히 변화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옛 모습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부분에서는 특별히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분쟁, 또는 파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어떤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이들은 아볼로에게, 어떤 이들은 베드로에게,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 파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뉜 것이 아니며,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은 모두 동역자로서 각각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한 것이므로,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합니다(1:10, 3:9). 혹시 우리 교회 안에도 서로 적대적인 파벌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420절에 요약이 되어 있는 것처럼, 바울은 교회 내에서 복음을 말로만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고 물리치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말에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실제 삶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교독할 텐데, 앞서 말씀 드린 내용들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20171123

사도행전 18:23-19:41

 

오늘은 다시 사도행전 18장으로 돌아갑니다. 1823절에서 20장 마지막 절까지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오늘은 19장까지 읽는데, 여기에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에베소는 고대 그리스 도시로서, 로마 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상업 중심지이자, 고대의 7대 기적 중의 하나로 불리는 아데미 신전(BC 6세기 완성)의 소재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바울은 두란노서원을 세워 약2년 동안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에베소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이유는 바로 그곳이 일종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10절은 바울을 통해서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듣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9:10).

성경에는 단지 몇 가지 사건만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볼 때 에베소에서 복음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전파되고, 당시 종교사회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말의 능력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 곧 물세례만 알던 이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이른 바 성령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자 그것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과 마술사들이 예수와 바울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내어 쫓으려다가 큰 봉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웃지 못 할 사건은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아데미의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주동하여 에베소 시내에서 일어난 일대의 소동은 거꾸로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였지만, 그들이 증거한 복음이 그 땅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서울, 광진구/성동구에서 복음은 어떻게 증거 되고 있습니까? 복음이 살아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전파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오늘 이 도시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질문하며 우리의 귀를 활짝 열도록 합시다.


2017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