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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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 날 것 같은 날이 있습니다. 특별히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주 아픈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별다른 이유 없이 봄비에 마음 젖어드는 날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가만히 눈 감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마치 소라 껍데기에 귀를 갖다 댄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을 바닥이 없는 검은 구멍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또는 강가에 홀로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의 그윽한 눈동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분명한 것은 그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입니다.


제가 만난 어느 시인은 인간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힘 또는 정서는 그리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자서전으로 여겨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고백록은 한 인간이 진리, 곧 신을 찾아 가는 영적 여행의 이야기인데, 이 여행을 떠나고 지속하게 하는 동력은 창조주를 향한 피조된 인간의 그리움입니다. 심지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이런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움은 마음 깊은 곳에 항상 내재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거나 바쁜 일들 속에 살아가느라 잊고 지낼 때가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자신을 대면하는 고독의 순간이 찾아오면, 자신에게 귀 기울여 달라고 외치는 그리움의 호소가 소라 고동 속의 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려옵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평소 길을 걷는 중에도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처럼 어느 날 문득 나타나기도 합니다.

 

향기

 

 

길을 걷다가

 

문득

그대 향기 스칩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꽃도

그대도 없습니다

 

혼자

 

웃습니다

 

- 김용택 향기전문.

 

이 시는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의 나무(2002)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꽃향기, 또는 그대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꽃과 그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향기(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향기를 내보내는 존재(원인)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독자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보통 시인들은 이런 시적 모순을 사용하여 보통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통찰이나 경험을 묘사하려고 하지요.


김용택의 나무에서 ’, ‘그대’, 또는 라는 시어는 그리움의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시집에 실린 봄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잎술이라는 시에서 그리움을 뚫고/ 오는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은 시인이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시, “시는 세상의 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향기에서 시적 화자가 뒤를 돌아보며 찾으려고 했던 그대도 시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움이란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거나 부재하다고 인식되는 대상을 향한 정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 곧 그리움은 있으나, 그리움의 대상인 꽃과 그대는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꽃도, 그대도 없는데, 시적 화자는 슬퍼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혼자 웃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시인은 의도적으로 모호성을 독자에게 선물로 남겨 두는 듯합니다. 의미는 시를 감상하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가 주는 힌트는 혼자웃습니다가 각각 한 연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단어로 한 연을 구성한 것은 독자들이 그 단어를 주목하고 좀 더 오래 음미하기를 바란다는 시인의 신호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꽃과 그대는 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리워하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개화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꽃은 무엇입니까?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꽃향기를 맡게 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리움과 더불어 혼자머물러 보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그리움을 뚫고 오는 당신의 꽃을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이 시 향기에서 그가 혼자 웃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Magazine Hub 60 (2018년 4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성흔(Stigmata)을 지닌 사람들 :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 

그리고 정호승의 〈거룩한 상처〉



1. 들어가며 : 인생의 상처, 상처의 종교


인생은 상처를 입고,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 잘리는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보드랍고 고운 아기의 얼굴에도 엄마도 아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만 손톱에 긁힌 상처가 나기 시작한다. 물론 아기의 생채기는 금방 아물지만, 이것을 시작을 우린 평생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그 흔적을 지니며 살아간다. 


그리스도교는 상처의 종교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상처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이들을 보듬는 종교다. 특히 사순절(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깊이 묵상하고,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마시는 때다. 예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상처를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거룩한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가 그를 따르는 사람의 몸에 나타난 것을 성흔(聖痕, stigmata)이라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στιγματα)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선언했고, 예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던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 곧 다섯 개의 상처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오늘날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바울의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성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흔이 상징하는 영적 가치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오늘 날 성흔을 묵상하는 것, 또는 성흔을 지니고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하여, 성흔에 관한 두 가지 자료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는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성흔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자료인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에 얽힌 이야기를 다룰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성흔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과 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다음으로 정호승 시인의 〈거룩한 상처〉를 분석할 것인데, 현대문학 작품인 이 시는 성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다. 


2. 특수한 성흔 : 사랑의 ‘다섯 상처’


성 프란체스코는 중세의 교회가 커다란 침체에 빠져 있던 1182년 무렵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여 기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극적인 과정을 거치며 회심한 뒤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그리고 그가 세운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는 탁발수도회 운동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열었고, 당시 침체된 교회에 거대한 활력을 불어 넣었다.  


프란체스코의 일생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그 중에 다른 성인들의 삶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이야기가 바로 그가 죽기 약 2년 전에 성흔을 받은 이야기다. 전기 기록자들에 의하면 1124년 9월 14일, 프란체스코는 베르나(La Verna)라고 불리는 은거처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홀연히 공중에 떠 있는 한 천사를 보게 되었다. 그 천사는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발과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동료 수사이자, 그의 전기를 최초로 기록한 첼라노의 토머스(Thomas of Celano: 1185-1265)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서,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그의 영혼은 그 환상으로부터 감각할 수 있는 의미를 분별하고자 매우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환상의 어떤 부분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였다. 그 환상의 새로움이 그의 마음을 매우 강하게 눌렀다. 그리고 그의 손과 발에 못 자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가 조금 전에 자신의 위에 떠있던 못 박힌 사람에게서 본 것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마치 창이 뚫고 지나간 것 같은 네모난 상흔이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끔 피가 흘러나와서 그의 겉옷과 속옷이 종종 그의 거룩한 피로 얼룩지기도 했다.[각주:1] 


첼라노의 토머스는 프란체스코에 대한 여러 편의 전기와 일화 등을 남겼는데, 여기서 번역하여 인용한 글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성 프란시스의 생애》의 한 구절이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최초의 자료가 일부 수정되고, 프란체스코의 성흔과 관련된 다른 기적들이 덧붙여졌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모두 문학 장르상 ‘성인전’(hagiography)에 해당하므로, 수록된 내용들의 역사적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성인전이란 객관적 사실의 전달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인물인지를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문학 형식이기 때문이다. 곧, 프란체스코의 성흔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성인전 기록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프란체스코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성흔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훌륭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 그는 자신이 받은 성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프란체스코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고, 전기 기록자들이 전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태도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첼라노의 토머스가 기록한 《성 프란시스의 생애》에 의하면,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성흔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을 훨씬 매력적인 인물로 보게 될까봐 자신의 상처를 숨겼다고 한다. 그래서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 성흔을 보거나 우연히 만질 수 있을 뿐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성흔이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겼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의 마음에 새로움이 매우 큰 강도로 경험된 것을 고려하면, 프란체스코의 성흔은 그리스도와의 고난과의 연합하는 체험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놀라운 새로움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는 프란체스코 개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커다란 은총을 기억하게 하며, 그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된 내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프란체스코의 성흔은 그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주님의 사랑을 입은 거룩한 성인임을 증언하는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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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편적인 성흔 : ‘거룩한 상처’


그런데 특이하게도 정호승 시인은 그의 시 〈거룩한 상처〉에서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성흔은 어떤 특정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성흔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상처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성흔〉 전문.[각주:2]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본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한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음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본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묻는다.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 않은가(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는다.



4. 나오며


우리는 프란체스코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고, 때로는 신비적으로 경험하면서 그것을 통해 개인적으로 영적 새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에서와 같이 성흔을 보편적인 상처로 간주하는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흔을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은총으로 간주했던 프란체스코 또한, 자신의 아픔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았던 사실들을 생각한다면, 성흔을 특수한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보편적인 아픔으로 보든지 간에 일단 성흔을 깊이 묵상하고 지닌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4년 전 고난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작년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이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2018년 사순절, 오랜 나날 강요된 침묵 속에 괴로워했던 많은 상처들이 너도 나도 “미 투(Me too)”라고 말하며, 소리치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3월 31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팀블로그에 거룩한 상처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글을 확장하여 「좋은교회」 2018년 3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1. Thomas of Celano, The Life of Saint Francis, Book 2, III, 94. [본문으로]
  2.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본문으로]

 


봄이 돌돌



봄이 되면 얼굴 만나 인사드릴게요. ^^”

! 봄이 오긴 오겠죠? ㅎㅎ

 

입춘이 며칠 지난 어느 날, 지인과 SNS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입춘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어 봄이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겨울 날씨가 혹독하여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이러한 진리를 누군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말입니다.


언젠가 집 근처의 강변을 산책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어도 몸이 잔뜩 움츠러드는 추운 날이었는데, 앙상한 벚꽃나무 가지에 아무도 모르게 새순이 돋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너무나 긴 겨울 속에서 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가의 벚꽃나무는 봄을 잊지 않았고, 새봄이 코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지요. 이처럼 꽃들과 나무들은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봄을 느끼나 봅니다. 그리고 시인들도 그런 꽃과 나무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길고 매서운 겨울과 같은 시기를 보내면서도 봄을 희망하고 노래하는 사람, 그리고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자신의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노래하는 사람이 봄의 시인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 ,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란 배추꽃,

 

삼동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여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처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1연에서 시인은 겨우내 얼었던 시내가 봄을 맞아 스르르 녹아 흐르는 것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돌돌 흐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싱그럽고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입니다. 우리 몸의 경우, 혈관을 통해 흐르는 피가 온몸에 산소와 영양분, 곧 생명을 공급해 주지요. 이처럼 시인은 시내가 대지(大地) 속에 혈관처럼 흘러 온 땅에 봄의 생명력을 전달해 준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렇게 시냇물이 흘러 시냇가의 언덕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같은 예쁜 봄꽃들이 피어납니다.


흥미롭게도 윤동주 시인은 이 작품에서 새봄을 맞아 소생하는 자연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봄을 맞은 자연과 동화된 자신의 시적 경험을 표현합니다. 봄은 마치 시냇물처럼 자신의 혈관을 통해 흐르고, 자신은 푸른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것이지요. 또한 3연에서는 종달새처럼 즐겁게 이랑에서 솟구쳐 올라 푸른 하늘을 향해 비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인이 봄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대자연과 동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삼동을 참아 왔기 때문입니다. ‘삼동(三冬)’은 석 달의 겨울, 또는 세 해의 겨울을 뜻하는 단어인데, 그만큼 겨울이 길고 지내기가 힘들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삼동, 곧 오랜 겨울을 인내하며 견디어 왔기 때문에 새봄이 그만큼 반갑고 즐거운 것이지요. 나아가 그는 자연세계와 동화되어 봄이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자신이 풀처럼 파릇파릇 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에서 삼동’, 곧 춥고 긴 겨울과 같은 시기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잘 견디어 낸다면 새봄을 맞아 풀포기처럼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때인 19426월 무렵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 일본강점기 말이라는 매우 혹독하고 긴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머지않아 봄, 곧 해방이 오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연에 보면 시인은 푸른 하늘로 완전히 날아 오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래에서 아른아른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절에 빗대어 말하면, 이제 막 초봄이 오기 시작한 것일 뿐 아직 완연한 봄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지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윤동주 시인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새봄, 곧 광복이 오기 불과 6개월 전에 일본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요절하였지만, 그가 부른 봄의 노래는 지금도 여전히 삼동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속에 돌돌 흐르고 있습니다.


Magazine Hub 59 (2018년 3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