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 읽기 |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 묵상하기 |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곧바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명절을 맞아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꾼들이 자리를 잡고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에게 짐승들을 파는 장사꾼들과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화폐를 성전에서 통용되는 동전으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성전의 바깥뜰을 차지하고 있었을 텐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멀리서 온 순례객들을 위해 동전을 바꾸어주고, 제물을 판매하는 것 자체는 납득할 만한 일이었지만, 당시 감람산에 허가된 시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뜰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 뜰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서 그런 식으로 오용된 데에는 당시 성전 관리를 맡고 있던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뜰을 내어주면서 그들로부터 금전적인 이득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무렵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도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전에 와서 드리는 순례객들의 기도와 제사는 순수성을 잃고 이방 종교들에서처럼 ‘신과의 상업적 거래’로 변질될 위험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로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장사꾼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여기서 “강도들”은 아마도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종교지도자들과 장사치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 마음이 찔린 대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적반하장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모의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성전은 ‘교회’나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나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또는 나의 마음속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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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안는 너

 

 

우리는 지금 겨울로 가는 여행 중입니다. 머지않아 길가의 나무들은 찬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앙상한 가지들을 모두 다 드러낼 것이며, 인정 많은 눈송이들이 추위에 떠는 가지들을 포근하게 덮어줄 것입니다. 열대 지방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겨울로 가는 여행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겨울은 춥고 혹독한 계절이지만, 우리에게는 겨울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등굣길에 나서는 아이의 주머니에 어머니가 넣어주는 손난로나, 어둑어둑한 퇴근 시간 차가운 길거리에서 구수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군고구마와 군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외에도 나무가 헐벗은 겨울도 꽃이 피는 봄으로 만드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 “거짓말”을 한 번 들어 보시지요.

 

겨울 차창

너의 생각 가슴에 안으면
겨울도 봄이다
웃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
겨울도 꽃이 핀다

어쩌면 좋으냐
이러한 거짓말
이러한 거짓말이 아직도
나에게 유효하고
좋기만 한 것

 - 나태주, 〈겨울 차창〉, 1·2연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홍성사, 2020)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딸에게 보내는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집은 시인이 사랑하는 딸, 나민애 님을 생각하면서 쓴 시들을 모은 책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시를 의도적으로 ‘어렵게’ 쓰는 어떤 시인들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쉽게 씁니다. 대신 대놓고 “거짓말”을 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진실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 시적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말은 시인에게 유효하고 좋을 뿐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유효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많은 공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시편들을 읽다가 보면 시인이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고 깊은지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랑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시 속에 나오는 딸이 시인의 딸,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딸들”임을 알게 됩니다. 실제 이 시집에는 25세 알제리 여성 “샤히라”를 비롯한 여러 딸들이 나옵니다. 나태주 시인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겐 이제 딸아이만 딸이 아니다. 세상 모든 예쁜 아이들은 다 딸이고 또 세상의 귀엽고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또한 모두가 딸이다. … 세상의 모든 딸들아. 살기가 힘드냐? 견뎌내기가 버겁냐? 그럴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하고 견뎌내야 한다. 너희들도 가슴속에 꿈꾸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품어보기 바란다. 다시금 너의 딸들을 사랑하기 바란다. 그러면 조금씩 견뎌지고 이겨내지고 끝내 꽃을 피워내는 날이 있기도 할 것이다.”

- 나태주, “책머리에: 딸아이 생각”,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 6-7.

 

이렇게 시인은 삶이 힘겨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너희들도 가슴속에 꿈꾸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품어보기 바란다.”고 애정을 담아 조언합니다. 이때 그 사랑스러운 것이란 다름 아닌 “너의 딸들”입니다. 그것은 시인이 그렇게 해서 힘겨운 인생길을 잘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겨울 차창〉에서 시인은 인생의 겨울에도 사랑하는 딸의 생각을 가슴에 안기만 해도, 그 마음에 웃고 있는 딸을 떠올리기만 해도 꽃이 피는 봄이 된다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딸아이”는 시인의 마음을 따뜻한 봄의 정원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인이 보는 겨울 차창 너머의 세계도 정겹게 만듭니다.  

 

지금은 이른 아침
청주 가는 길
차창 가에 자욱한 겨울 안개
안개 뒤에 옷 벗은
겨울나무들

왜 오늘따라 겨울 안개와
겨울나무가 저토록 정답고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냐.

 - 나태주, 〈겨울 차창〉, 3·4연

 

이렇게 이 시는 “왜 오늘따라 겨울 안개와 겨울나무가 저토록 정답고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답을 몰라서 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답은 1연에 다 나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답이 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독자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한 신문 인터뷰에서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 시는 굉장히 허술해요. 그래서 독자가 완성합니다. 무엇으로요? (공감의) 울음으로요. 시 ‘풀꽃’에도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한 줄을 더 넣어요. 그것이 보편입니다.”[1] 비슷하게 〈겨울 차창〉에서도 시인은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이 시를 완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곧, 독자들이 자신들도 누군가의 마음을 겨울에서 봄으로 바꾸는 “딸아이”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들의 소중한 “딸아이”를, 또는 “아들아이”를 마음에 안아 추운 겨울과 같은 힘겨운 삶을 견디어 내도록 응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겨울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에도 봄꽃을 피우는 “딸아이”가 있는 한 을씨년스러운 겨울 안개와 쓸쓸한 겨울 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경도 따스하고 정다운 세계로 바뀔 것입니다.


[1]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말 ‘네 뒤엔 내가 있단다’” (동아일보, 2020년 1월 15일).

 

 

Magazine Hub 116 (2022년 1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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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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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밖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낸 예수님 일행은 다음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시장하셨는데, 마침 멀리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보였습니다. 주님은 혹시 그 나무에 먹을 만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나무에는 잎사귀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가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지금도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 열매는 주로 여름에나 열리지만, 이른 무화과는 이 즈음에도 얻을 수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많은 해석가들은 본문 속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성전의 기득권자들을 상징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화려한 종교적 외양은 갖추었지만, 실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가 없는 껍데기 뿐인 종교인들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내가 사는 도시에 오셔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또는 만약 주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열매를 찾으신다면, 나는 주님께 어떤 열매를 내어드릴 수 있습니까?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을 마주보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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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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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드디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벳바게와 베다니 인근에서 잠시 멈추어 서셨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맞은 편 마을로 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곳에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테니 데리고 오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왜 그렇게 하냐고 묻거든 그에게 대답할 말도 알려주셨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 새끼가 있었고, 묻는 사람도 있었으며,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자 허락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나귀를 탄 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에 노새를 타고 기혼 샘으로 내려갔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왕상 1:32-48). 곧, 예수님은 솔로몬이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던 순례자들은 그 길에 자신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았는데, 이것 또한 예수님을 임금으로 오시는 메시야로 모신다는 의미였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찬송하였는데, 그 말에는 “오 구원하소서!”, 또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정치적인 메시야로 여기며, 주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하여 그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나라는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막 1:15)였습니다. 앞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겠다고 경쟁하였지만, 겸손하신 주님은 왕으로 입성하시면서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슥 9: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정작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도 그곳에서 군중들을 선동하여 어떤 정치적 혁명을 이루거나 영광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성전에 들어가 모든 곳들을 둘러 보신 후에 날이 저물고 군중들의 흥분도 식어지자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시 베다니로 나가셨을 뿐이었습니다. 베다니는 “고난받는 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군중들의 인기에 힘입어 슈퍼 스타의 자리 위에 앉기 보다, 베다니, 곧  고난받는 자의 집으로 내려가서 머무셨습니다. 이 본문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성전을 둘러보신 후 다시 베다니로 나가시는 주님을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환호하는 군중들과 성전을 둘러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당신은 성전의 높은 보좌와 고난 받는 자의 낮은 집 둘 중 어느 쪽에 더 마음이 더 끌리십니까? 주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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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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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일행은 드디어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번화한 도시였고, 예루살렘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구걸을 위해서 앉아 있던 한 시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였습니다. ‘바디매오’ 또는 ‘바르디매오’라는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저 ‘바-디매오’, 곧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불릴 뿐,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을 불렀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잠잠하리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크게 주님을 불렀고, 그 절박한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주위 사람들의 격려 속에 뛰어 일어나 주님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린 그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날 그가 여느때처럼 여리고의 길가에 앉을 때 기대하던 것은 사람들의 동정이었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대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나요?”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간절한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그에게는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디매오에게  “가세요.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그는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따라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나에게 어떻게 다가 옵니까? 나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길 가시는 주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그 소원을 말씀드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나 의미를 두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나의 존재를 매우 의미 깊게 여기시고, 나의 소원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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