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37:1-9, 마태복음 5:4

제목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후 2012527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말을 한 번 이상씩은 다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은 태어났을 때, 또 한 번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가 망했을 때. 요즘 어떤 젊은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세 번째 때를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운다로 바꾸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기준으로 삼으면, 저는 남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고, 어지간한 일에는 슬퍼하지 않는 강인한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드라마에서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면 여성 시청자들이 멋있다고 이야기하고,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도 종종 대중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등 그 정도가 좀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말은 여전히 한국 사람들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나아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울음을 참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이며 바람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왜 이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웃어라 캔디야 들장미 소녀야, 울면 바보야 캔디 캔디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외롭고, 힘들고, 슬프다고 울면 바보일까요?

 

시온의 노래 대신 시온을 기억하는 노래

    오늘 본문 시편137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시절의 경험을 담고 있는 비탄시 입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며 노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온(Zion)은 좁게는 예루살렘의 시온산, 넓게는 이스라엘 땅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시편은 주전 6세기에 나라가 망한 뒤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던 때에 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 땅에서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시편에 담겨진 아픔은 고향에 대한 향수 그 이상으로 굉장히 쓰라린 고통입니다. 계속해서 2절과 3절 말씀을 보면, 시적 화자들은 바벨론의 강변들에 있는 버드나무에 자신들의 수금을 걸어 두었는데수금은 현악기의 일종입니다그 이유는 자신들을 포로로 사로잡은 자가, 곧 그들의 나라를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든 침략자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불러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서 이 상황을 다시 표현해보겠습니다. 먼저 때와 장소를 바벨론이 유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바벨론에서 열린 큰 잔치라고 가정해봅시다. 바벨론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포로들을 끌고 온 것으로 인해 기쁨에 도취되어 술잔을 들이키고 있습니다. 그러다 자신들끼리 웃고 떠드는 재미가 조금 시들해질 무렵 누군가 포로들을 불러 노래를 시켜보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포로들 중에 몇 명을 끌고 나아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들 중의 하나를 불러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온의 노래란 어느 특정한 장르의 노래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히브리인들이 고향땅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넓게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편이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전능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찬양하는 노래들이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시로 알려진 시편 18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그의 화살을 날려 [원수]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넒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편18:13-19).

 

    여러분 이와 같은 노래를 포로가 된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을 사로잡은 바벨론 사람들 앞에서 부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노래의 내용은 구원의 하나님, 그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그들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전쟁에서 패해서 나라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먼 타국땅에 강제로 끌려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노래를 원수들 앞에서 부른다면 히브리인들 그 자신들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리겠습니까?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가 노래하는 구원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하나님과 자신들을 조롱할 거리를 주는 것이므로 그들은 차마 시온의 노래를 자신들의 원수들 앞에서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절에서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라고 생각하며 바벨론 사람들 앞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 이후에 자신들의 그 쓰라린 고통을 담아 부른 노래가 바로 오늘 본문 시편 137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탄의 노래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기억과 망각 1 : 정체성

    5절과 6절을 제가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기쁨의 근원으로 삼겠다는 자기 결단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고향이며 영적, 정신적 뿌리인 예루살렘을 반드시 잊지 않고 기억하며,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오와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화자는 만약 자신이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또는 예루살렘보다 바벨론에서 누리는 삶을 더 좋아한다면 차라리 자신의 오른손이 말라 비틀어져서 다시는 수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할 수 없게 되어버리라고,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왜 시적 화자는 이렇게 자신을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려고 할까요?


    영어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 곧 시야에서 멀어지면 생각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보지 않으면 점점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이지요.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끌려온 초기에는 고향을 간절히 그리워하다가도 점점 타국 생활에 적응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면 점점 예루살렘을 잊게 될 가능성이 많았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들은 히브리인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이방인들의 생활 풍습에 동화되어 살아가다가 결국 세상에서 히브리인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벨론이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유대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다른 정복지들에서도 사람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각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없애버리고, 오직 바벨론 제국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이 취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아마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일본은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란 것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일본 천황의 신하와 백성으로서 황제의 나라인 일본에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문화와 언어를 말살하기 위해, 한국어와 한국식 이름을 대신해서 일본어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였습니다. 곧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철저하게 말살하려고 시도하였지요. 비슷하게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뿌리 뽑기 위해서 대학살을 감행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nonidentity 곧 비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정체성의 위기 또는 비정체성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20세기 초반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이런 비정체성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제 시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 끌려간 한국 여성들은 한 가정의 사랑받는 딸, 한 남자로부터 사랑 받는 연인이라는 정체성을 빼앗기고 일본군의 성적 노예로 전락되어 학대를 당했습니다. 비슷하게 노동자나 군인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 되었던 한국 남성들도 한 가정의 아버지, 아들 또는 한 여인의 남편이라는 정 체성을 빼앗기고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박탈당한 채 일하는 짐승 또는 전쟁 물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비정체성의 경험은 초기 미국 한인 이주 역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아시다시피 미주한인이민사는 1903년 초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101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일꾼으로 건너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주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농장주와 감독관들은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생산 기계와 같이 대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인들은 영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해고될까 두려워 노동력을 착취 당하고 매를 맞아도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항상 숫자를 적은 카드를 신분증 (identification card)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워 지지 않았고 오직 숫자로만 호칭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7편에서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인들도 이와 같은 정체성의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침략자들이 그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간 것 그 자체만으로도 히브리 사람들의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고 한 의도가 있었으며, 더욱더 그들 자신이 예루살렘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히브리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5절과 6절에서 화자는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기뻐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화자가 시온의 노래 부르기를 거절한 것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벨론인들을 위한 오락의 도구로 삼으려는 침략자들의 의도에 저항한 것입니다. 사실상 자신의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는 침략자들의 공격에 항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우리가 육체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끼니 때 마다 밥을 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들려고 하고, 시적 화자는 반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망각과 기억 이 두 가지의 힘이 존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본 제국주의나 나치 독일과 같이 정치적인 세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람들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들려는 경우도 있고, 개인이 세상 문화 속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집단의 가치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동화시킴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통 남성들은 고급 자동차로, 여성들은 명품백이나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것들이 결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못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런 외적 치장을 통해서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쉽게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의 목적인 무엇인지, 자신의 창조주와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함으로서 망각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내가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린다면 차라리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말을 하지 못하고, 내 손이 말라 비틀어져 골프를 치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결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기억과 망각 2: 고통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절과 8, 9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역시 이 부분에서도 기억과 망각의 역동이 서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한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이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에돔과 바벨론의 악행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에돔은 이삭의 형제인 에서의 자손으로서 엄밀히 따진다면 히브리 민족과 형제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에돔과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유다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유다가 바벨론에 패해서 망할 때에 형제 나라를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기초까지 헐어버리라고 바벨론을 부추겼습니다. 여기서 헐어버리라는 단어는 70인역이라는 사본에서는 “raze”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는 비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는 에돔의 외침은 히브리 사람들의 이름을, 그들의 정체성을 그 뿌리부터 완전히 뽑아버리고 지워 버려라는 뜻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 적들이 행했던 악행들은 단순히 히브리인들을 육체적으로 학살하고 사로잡는 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일, 슬픈 일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과거 겪었던 어려움들과 힘들었던 일들은 빨리 잊어 버리고 즐거웠던 일들만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기자는 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이 망하던 날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려고 합니다. 자기만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그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에돔은 히브리인들을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지만, 반대로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그 환난의 날을 기억함으로써 그날을 역사에 생생하게 남겨두려고 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기억으로써 망각의 힘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망각이라는 공격에 대항하여, 하나님께 원수들의 악행을 기억해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은 왜 이렇게 계속해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빨리 잊지 않고 계속해서 그 기억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일까요?


    고통은 망각의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고통의 경험은 내가 의식 속에서 억지로 지워버리려고 해도 무의식 속에 남아서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어느 순간에는 의식 위로 솟아올라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습니다. 고통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고통스러운 일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혼자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시편137편의 화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즉 기도 속에서 그 고통스러운 일들을 꺼내고 기억할 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하나 하나 만지시고 치유하시기 시작합니다. 상처를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두고서 그 상처가 치유되길 기다리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고통을 하나님 안에서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비탄의 노래인 시편 137편의 가장 중심입니다.


    사실 시편 1377-9절은 성경에서 가장 잔인한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원수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어린 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이 기원은 비인간적인 것은 둘째 치고, 아버지의 죄로 자식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에스겔서의 말씀과도 모순을 이룹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이 부분은 시편 교독문에서 항상 제외 되었으며, 설교에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이와 같은 잔인한 내용이 실제로 그와 같이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의 노래가 아니라 전혀 그런 힘이 없는 포로들의 노래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분은 포로로 잡혀간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고통과 분노를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잔인하게 복수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원수들을 심판하든 용서하든 그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지 그들 자신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들의 고통을 쏟아내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함으로써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의 잔인한 기원과 저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아픔을 만져주시고 분노를 사라지게 해주시길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시편 137편은 포로로 잡혀간 히브리인들의 망국의 슬픔과 비정체성의 경험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낸 울부짖음입니다. 비탄이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고통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의 호소입니다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차 세계 대전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일제 식민지배도 이미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과 자연 재앙 등으로 인한 고통이 끝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위안부와 노동자, 군인으로 징용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여전히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리아에서는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고,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이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 중에는 육체의 아픔, 가정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가족을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윤동주 시인의 이름을 한 번씩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윤동주는 어떤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며, 그가 쓴 <서시>, <별헤는 밤>, <십자가> 등은 아름다운 시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에는 슬픔, 울음, 눈물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국이 일제 치하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시기였고,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서, 청년 지식인으로서, 시인으로서 그런 당대의 슬픔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쓴 시 중에 <애기의 새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낭독해 보겠습니다.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이 시에 나오는 우리집은 닭 한 마리도 키울 능력이 없는 매우 가난한 집입니다. 시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곳입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문명도 뒤처져있지만 우리집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는 애기입니다. 우리집에 새벽이 오는 것은 시계가 울리기 때문이 아니라, 닭이 울기 때문이 아니라, 애기가 배고프다고 울기 때문입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새벽이 되면 애기가 젖달라고 운다라고 써야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애기가 젖 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새벽이 된다고 노래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울 때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나오는 가난하고 낙후된 우리집은 일제 식민지 시대 힘없고 약한 우리 나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벽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애기는 당시 힘이 없던 한국인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 시인은 우리집의 새벽, 곧 조선의 독립은 한국인들이 울 때 온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시편 137편에서 본 것처럼 울음은 단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이며 호소입니다.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울어 보지 못한 사람은 위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