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게재한 글을 옮겨 놓는다. 이 시는 지난 9월 1일 겟세마니 수도원에 있는 머튼의 첫 번째 은수처를 방문한 날에 쓴 것이다. 인생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 때의 집은 이 땅의 어떤 지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그리고 다시 돌아갈 그분의 품이다. 그분 안에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이 아닐까? 그래서 영적 갈망은 곧 향수이며 그리움이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집으로 가는  안나의 

(A Way to Home: Saint Anns)

 


1.

들판을 가로질러

낮은 숲으로 향하는

호젓한 시골길

 

발밑에서 돌멩이 형제들이

자글자글

나무 위에서 참새 자매들이

쫑알쫑알

한낮의 뜨거운 땡볕에

삭발한 정수리가 익어가도

길옆의 들꽃도 덩달아

설레는 즐거운 

 

낮은 담장 옆으로 마차의 행렬이 지나가고

대문 앞에서 엄마가 손짓하고

나도 모르게 어린 아이가 되어

아장아장 서섹스(Sussex) 걷는 

어제를 걷는 

 


2.

세상과 갈라진 샛길

마침내 발견한

외딴 판잣집

평생 찾아온 그곳

페인트로 흰색의 튜닉과

검은색의 스카풀라를 입히고

붉은 색의 십자가를 다니

대리석이 빛나는 대저택보다

호화스런 침묵이 찬연한 

 


3.

태초부터 속해 있던

고독

나를 반기고

 

헛간 구석까지 가득 채운

바람

열망을 태워 하늘을 내달리고

 

묵묵히 주위를 둘러싼

나무

함께 교회를 이루고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하늘

통해 세상 모든 나라 하나가 되는 사막

 


4.

 낮의 짧은 

낭만 속에 안주하게 될까봐

고독을 소유하려 할까봐

 

과묵한 트랙터 수사가

굉음으로  떠밀어

 다시 여행에 오르는

집으로 가는 



2012. 9. 1.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하나님과 고독에 대한 열망으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더 깊은 고독을 찾아 공동생활을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아닌 은둔생활을 하는 다른 수도회로 옮기고 싶어했다. 이러한 그를 위해 수도원장은 그가 겟세마니 수도원 안에서 은둔자(hermit)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953년 머튼은 숲속에 버려진 헛간에서 하루의 낮 동안 몇 시간을 머물러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머튼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그곳을 '성 안나의 집'(St. Ann'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옷과 같은 검은색과 흰색의 페인트로 칠했다.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 안나의 은수처는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 내 일생 동안 바라던 것이었던 것 같다 …… 나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자리를 찾은 느낌이 어떤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서섹스(Sussex)를 온통 걸어 다녔던 어린아이를 생각한다. 나는 이 오두막집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또는 언젠가 그것을 찾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하늘 아래 하나이다."


"나는 이 집을 알지 못했던 11년 전부터 이 은자의 집으로 옷 입혀졌다. 이 희고 검은 집은 실제로 일종의 확장된 수도복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여행할 필요가 없다 …… 성 안나의 집의 조용한 경치는 다른 어떤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나를 허락하기만 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


이곳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기도인 "나의 주님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릅니다"가 쓰여졌다. 그러나 머튼은 성 안나의 집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수도원 경내의 각종 공사를 위해 동원된 트랙터의 굉음이 그의 고독을 방해했다. 그는 1965년 수도원 내의 에큐메니컬 대화 위해 마련된 장소를 새로운 은수처로 사용하도록 허락받는다. 


성 안나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와 위의 인용문은 《고요한 등불: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윌리엄 셰논 지음, 오방식 옮김 (서울: 은성, 2008), 304-309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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