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3:1-13


므낫세는 남유다의 역사상 가장 악한 왕들 중 하나이다. 므낫세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악행들은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왕하23:26). 오늘 그의 삶에 관한 부분을 읽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7a.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더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눈에 보이는 신을 '자기 손으로' 만든 자이다. 마치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그의 선조들처럼.
인간이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고, 제사를 통해서 그 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므낫세에게 있어서 신이란 그랬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명확성' 속에 있는 하나님 대신, '확실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해와 달과 별들에게 제사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형상화하여 목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신전에, 하나님의 자리에 갖다 두었다.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에 투사(projection)한다. 비록 므낫세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내어 그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때로는 '불명확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일 것이다. 현재의 불투명한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 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을 만들어내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갈망하고 그 불명확성을 직면하는 것, 그 속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므낫세를 돌이키시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으나 므낫세와 유다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고, 므낫세는 환난과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제 그는 그가 신을 만들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지 않은 신 곧,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므낫세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13b.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결국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위해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다. 많은 이들이 돈과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노력한다. 나에게 있어서도 절약은 항상 노력하지는 못하더라도 지속적인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므낫세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알기 위해 불필요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도록 그 대가를 '절약'하는 일은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 했다. 나와 내가 섬기는 이들이 이런 '절약'을 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삶의 불명확성 속에서 굳이 '의미' 또는 '개념'이라는 인위적인 등을 달기보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의 의미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한 줄기의 진리의 빛을 기다리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2012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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