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6. 금


평화로운 아침이다. 한 이웃이 한국으로 가는 우리 부부를 배웅하기 위하여 오셨고, 다른 이웃이 몸이 아픈 중에도잘 다녀 오라는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또 다른 벗이 우리를 공항꺄지 태워다 주셨다. 이렇게 평화롭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마음엔 여전히 불안이 존재한다. 혹시 한국에서 긴급한 연락이 오지 안을까 계속 전화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 최근 이틀 동안 새벽에 계속 위기가 찾아 왔기에 한국 시간으로 새벽인 이곳 오전이 더 염려가 된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아내가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제발 그러기를.


오후가 되면서는 '강제 무소식'의 시간이 되었다. 비행기 속에 있는 약 열두 시간 동안에는 아무런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열려 있는 소통의 채널은 오직 기도 밖에 없다. 그래서 오랜 시간 비행기 안에서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가 없다. 내가 영화에 몰입해서 잠시라도 아버지를 잊을까봐, 기도하기를 쉬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렵다. 아버지를 잃을까봐 두렵다. 지금 내가 한국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까봐 두렵다. 어버지께서 아들이 오기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 내가 한국에 도착한 직후 아버지께서 곧 마지막 숨을 내쉬게 되실까봐 그것도 걱정이 된다. 간혹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계신 분들이 멀리 있는 가족들을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그들이 도착해서 만나게 되면 '그제서야'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 숨을 거두시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전에는 이런 말이 멀리서 달려온 가족에게 얼마나 속상한 말이 될 수 있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아버지께서 내가 올 때까지 마지막 숨을 연기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를,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더 힘을 내셔서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


영화를 보는 대신에 성경을 폈다. 마가복음 4장 35-41절.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 저편으로 건너 가다가 풍랑을 만난다. 갈릴리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도 자신들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배에서 주무시던 주님을 깨웠다. 주님은 일어나셔서 사나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0). 태평양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도 제자들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곧 돌아가시든지, 다시 회복하셔서 수명이 연장되든지 간에, 이 문제를 주님 손에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그래서 두렵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 시간이 아버지께서 회복하시는 시간이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이 아버지를 보내드릴 준비를 하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틀 전 어머니는 짧은 전화 통화 속에서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가? 나도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해 가고 있걸까? 물론 머릿속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을 포함한 갖가지 상황을 다 생각하고 대비해 보려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준비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이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럽다. 그래서 극단적인 결과가 오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다. 물론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는데도 그것이 눈앞에 커다란 가능성으로 다가오니 참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는 사람들의 충격과 고통이 얼마나 큰 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정도일 것이다. 


2008년 8월 19일, 오 년 뒤에는 공부를 끝내고 돌아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머나먼 유학길에 오르던 날. 아들을 공항까지 배웅 나오신 아버지는 살짝 눈물을 보이셨다. 오 년 뒤까지 당신께서 살아계실지 자신이 없으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사 년 팔 개월이 흘렀는데, 내 공부는 예상보다 더 길어지고 아버지는 급속도로 쇠약해지셨다. 그 사이 재작년에 부모님께서 내가 사는 미국으로 오셔서 한 달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내긴 하셨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유지하셔서 꼭 내 졸업식에 참석하시고 싶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러러면 아버지께서 더 사셔야 하는데, 다시 건강을 회복하셔야 하는데……. 비행기는 이미 날짜 변경선을 지나 한국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