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5:5, 시편 37:7-11 

제목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주후 2015년 3월 1일


왜곡된 행복의 추구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얼마 전 우리는 새해를 맞아 이렇게 서로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원합니다. 또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삶’,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 최대 목표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의 목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다 소유할 수 있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돈은 별로 없어도 삼시세끼를 먹을 수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사는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잘 되어 걱정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께서 얻기 위해서 날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하나님께 구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혹시 내가 추구하고 원하는 행복이 참된 행복이 아니라 거짓 행복은 아닌지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작년에 번역 출간된 서적 중에 《행복의 역습》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로널드 드워킨(Ronald W. Dworkin)이라는 미국의 의사 겸 정치학 박사인데, 그는 이 책에서 “행복 강박증”에 대해 언급합니다. 잘 아시듯이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게 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나 ‘강박’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행복에 대한 추구도 지나치면 ‘행복감’, 즉 ‘행복의 느낌이나 생각’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 강박증”이란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눌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태가 되면, 주종 관계가 전도되어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감’에 사람이 종속당하게 됩니다. 《행복의 역습》의 저자 로널드 드워킨은, 점점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행복감’을 얻기 위해 ‘정신작용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우울감, 불행감, 분노, 절망, 스트레스 등을 잘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 알의 약으로 쉽게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항우울제와 같은 ‘정신작용약물’을 찾습니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약물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행복을 “인공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인공 행복”에 대한 추구로 미국 사회는 점차 병들어 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인공 행복’이 성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의 의사들과 보험회사,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공 행복’ 장사가 이들 의료집단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기 때문에 1차 주치의들이 쉽게 약물을 처방한다고 합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가지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딤후6:10)처럼 일부 의사들과 보험회사, 제약회사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삶이 병들어 가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다가 미국의 교회들도 1950년대 이후 복음을 세속적인 ‘행복’의 개념으로 변질시킴으로서 사람들이 행복 강박증에 병들게 하는 데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에 대한 잘못된 추구가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요?


지난 주 우리 한반도에는 5년 만에 최악의 겨울 황사가 있었습니다. 잘 아시듯이 미세 먼지와 황사의 원인은 중국 대륙에서 날아오는 모래와 먼지, 중금속 가루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염은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존 소브리노(Jon Sobrino)라는 이름을 가진 남미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행복’의 개념을 변질시켜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각주:1] 마치 중국과 대륙에서 날아온 먼지와 모래들이 우리가 사는 한국의 대기를 오염시켜 황사를 일으키듯이, 미국이 전파하는 왜곡된 행복의 개념이 많은 세계인들의 생각과 문화까지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란 큰 부자는 아니어도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소유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전자제품을 소유하고, 좋아하는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즐기며, 종종 가족과 함께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건강한 몸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가끔씩 좋은 일에 기부도 하구요. 아마 눈치 채신 분들도 있지만, 이러한 행복은 거의 모두 소비와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곧, 돈으로 어떤 상품을 구입할 때, 또는 무형의 서비스를 소비할 때 누릴 수 있는 행복감, 만족감들입니다. 그래서 <타임(Time)>이라는 잡지는, 2013년 7월(8일, 15일)호에서 미국인들의 “행복 추구(Pursuit of Happiness)”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오늘날 미국인들이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약물, 음식, 그리고 영화나 스포츠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유흥) 등에 의존한다는 통계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비적인 행복(consumptive happiness)”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각주:2] 


    이런 소비적인 행복감은 일시적이며, 그 추구는 끝이 없습니다. 소비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오래되어 신선함이 사라지면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것을 소비할수록 장사하는 사람들, 특히 대기업, 자본가들은 이득을 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 드린 존 소브리노라는 남미의 신학자는 미국의 자본이 이런 왜곡된 행복의 개념을 다른 나라에도 이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혹시 제가 조금 전에 보통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 드릴 때에, 나와 비슷하다고 공감하신 분들이 많지는 않으신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이라는 공기도 오염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온유한 사람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복,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여덟 가지로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여덟 가지 모두가 중요하지만, 오늘은 그중 세 번째 복에 대해서만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떠십니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얻는다는 이 말씀이 잘 이해되시는지요? 사실 이 말씀은 경쟁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납득하기에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언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온유는 경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질로 여겨집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따뜻하고 부드럽기보다는 냉철하고 강인해야 한다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크고 작은 거짓을 행하는 사람들, 또는 불법이나 편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땅과 재산을 차지하기가 쉬운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매매하며 부동산 가격을 올립니다. 그러면서도 다운계약서를 작성하여 탈세함으로써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얻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불성설, 즉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시편37편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주님의 깊은 뜻을 조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아마 이 시편이 기록된 시대에도 악한 이들이 형통하여 부유하고, 의로운 이들은 가난하고 힘들게 지내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공평한 세태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의로 많은 소유를 가진 자들을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시편 말씀은 악한 이들로 인해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악한 이들은 풀과 같이 곧 마르고 말겠지만, 의인은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시편 37편 7-11절 말씀을 제가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악인들은 풀과 같아서 짧은 순간 무성하게 자랄 수는 있겠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쇠잔하고 말 것이지만, 주님을 소망하는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장 악인들이 득세하고 성공한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 말씀에서 ‘의인’은 ‘온유한 자’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곧, 시편 37편에서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란, 악인의 형통에도 불평하거나 분노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직 주 하나님을 소망하고(시37:9) 잠잠히 인내하는(시37:7)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시37:4), 주님께 자신의 길을 맡기고 의지하는(시37:5)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자라나는 성품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소망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절망하거나 안절부절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앞이 막막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 자신의 길을 맡길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주님을 알기에 불의한 방법으로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바른 법도를 지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온유가 있습니까? 방금 읽으신 온유의 여러 가지 측면들 중에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지금 잠깐 생각해봅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만약 천성적으로 온유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에게만 복이 주어진다면, 팔복의 세 번째 복을 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복은 모든 기질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이 열려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모세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사십 세 쯤 되었을 때, 당시 이집트 왕자의 신분이었던 모세는 이집트 사람이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약 사십 년 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 때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을 내거나 금송아지 우상에다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내던지기도 했지요. 이처럼 모세는 의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40세에 이집트에서 홀로 도망친 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또 80세에 동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온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지고 다듬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민수기 12장 3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곧,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변화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온유는 주님의 손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다혈질이거나 성미가 급한 사람도 주님의 손에 길들여질 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무뚝뚝한 성질을 타고 났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토기장이이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빚어 주시길 부탁하십시오. 목자이신 주님의 손에 길들여지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은 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온유는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배운 사람은 당연히 온유하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다정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음성을 듣고, 초대에 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초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초대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동체를 향한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경 다른 곳을 찾아보면, 온유는 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서 주의 종은 마땅히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일꾼은 화를 잘 내거나 목소리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잘못한 사람을 권면하거나 징계할 때에도 온유함으로 해서 그가 다시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갈6:1, 딤후2:25). 또한 온유는 성령의 열매(갈5:23)이며, 공동체를 세우는 덕목(엡4:2-3)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 분쟁과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대부분 ‘온유’라는 성령의 열매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온유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같은 다른 덕목들과 더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무기이며,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방편(딤후6:11-12, 벧전 3:15)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신앙의 분투에서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폭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온유함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며 권면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전도법에 대한 많은 책과 세미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적인 방법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품은 소망을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한 번에 수 천 명씩 전도한 소위 ‘전도왕’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으로 우리의 소망, 복음을 증거하라는 그의 권면은 매우 믿을 만합니다. 만약 내 주변의 가족과 이웃들, 직장 동료들이 나의 소망, 나의 믿음에 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가 정말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지, 온유한 사람인지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의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과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5:1-2) 당시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힘이 있고,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힘이 없는 이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주님께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팔복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는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제자들은 꼭 열 두 제자들로 한정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 모여든 많은 무리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가르침을 실천하고자하는 더욱 헌신된 그룹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들 중에는 아마 시편37편의 배경이 되었던 사람들, 곧 악인의 형통으로 인해 불평하고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제자들에게 악인들로 인해 불평하고 시기하지 말고, 온유한 사람이 되면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지리적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이지, 지리적인 땅으로 구성된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5절의 팔복의 세 번째 말씀은,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온유한 사람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복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지금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누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복의 근원과 통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먼저는 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초대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처럼, 이웃들에게 복음을 백 번 말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보다 우리의 온유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한 방법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제자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하고 온유한 삶을 통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합니다. 정말 이런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1절에서는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에게 주시는 풍성한 화평은, 앞서 말한 소비적인 행복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물질이나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얻게 되는 일시적인 만족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화평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의와 평화와 기쁨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풍성한 화평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과 풍성한 화평을 누리는 복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행복은 소비나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4세기의 위대한 교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을 위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요동합니다.”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와 참된 행복을 찾아 방황했지만, 그는 결국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근원적인 추구는 오직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전까지 인간은 참된 만족과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요동하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사람, 온유한 공동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시 <십자가>에서 그는 “행복한 예수그리스도”라고 노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자신의 생명을 버려 온유한 어린 양 같이 십자가 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 그였지만, 윤동주 시인의 눈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가장 온유하신 그 분이 진정 행복한 존재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 오셨습니까? 여러분들께서 꿈꾸는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오염된 행복이 아니라, 소비와 소유, 또는 일의 성취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풍성한 평화와 즐거움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창립 OO주년을 맞은 OO교회 공동체가 온유한 사람들로 가득 찬 공동체가 된다면, 이 지역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지역의 구석구석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기쁨과 화평을 심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하나님 나라라는 울창한 숲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온유한 사람, 악인으로 인해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소망하는 사람, 주님께 자신의 길을 맡기는 사람,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진 사람, 쉽게 분노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온화하게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풍성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Jon Sobrino, Where Is God: Earthquake, Terrorism, Barbarity, and Hope (Maryknoll, NY: Orbis, 2004), xi. [본문으로]
  2. Jeffrey Kluger, “The Happiness of Pursuit,” Time (July 08 and 15, 2013). Accessed February 28, 2015,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2146449-1,00.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