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9, 27:45-56, 화평하게 하는 사람

주후 2015년 3월 29일


갈등과 다툼의 원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갈등과 다툼이 가득합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갈등, 그리고 한 국가 안의 사회적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 사이에도 불화가 존재합니다. 이 다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만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갈등은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의 갈등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자 몹시 화가 나서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창4:3-8).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이른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의 부모, 아담과 하와 사이의 다툼입니다. 잘 아시듯이 하나님은 태초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다른 열매는 먹어도 좋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꼬임에 넘어간 하와가 그 명령을 어기고 금지된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그 ‘금지된 행동’에 동참하기를 초청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는 자꾸 ‘전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 혼자만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이 하자고 권합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할 때 더 대담해지고, ‘나 혼자 이러는 게 아닌데’, ‘다들 이렇게 하는데’라고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으로 불편한 마음이 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남편도 자신의 범죄에 동참하기를 권했고, 아담도 그 초청을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이때까지는 아주 사이가 좋은 부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질책하시자, 아담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책임을 아내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성경에는 자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죄를 짓고 난 후에 아담과 하와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담은 하와에게 나는 원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당신이 나를 유혹해서 이렇게 되었다며, 모든 것이 당신 때문이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와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하와는 내가 억지로 먹인 것도 아니고, 당신이 직접 먹었으면서 왜 나를 원망하냐고, 왜 그리 비겁하냐고 그랬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다툼은 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세상은 정말 평화로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도, 싸움도, 폭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이후에 세상에 다툼과 폭력이 독약처럼 퍼져갔습니다. 그 독약은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에까지 퍼져서 동물들 사이에도 평화가 깨어지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5장에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나라는 놀랍게도 육식 동물인 이리와 초식 동물인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어울려 노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사야 65장 25절 말씀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에 묘사된 나라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완성하실 나라이지만, 아마도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도 이렇게 모든 동물들이 평화롭게 어울리는 낙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피조 세계도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갈등과 다툼의 뿌리는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씨앗이 자라 맺는 열매가 불화와 싸움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의 파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의 파괴에서 기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신 것이라며, 오히려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며 달콤하게 유혹했습니다(창3:5).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했다면 그들은 결코 금지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먹은 하와도, 그리고 하와의 권유에 따라 동참한 아담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 곧 사탄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의 파괴는 이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의 파괴로 이어져,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과 아벨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라는 영성가는 하나님은 “숨겨진 사랑의 근원(hidden ground of love)”이어서 그 안에서 온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로 묶여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안에 있는 다른 이들과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다와 하나가 되면, 바다 안에서 다른 곳에서 흘러온 강물들과도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 갈등과 불화 속에서 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아닌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어떤 죄의 뿌리가 있어 갈등과 다툼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하고 솔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소수의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은 것처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고소한 것처럼 악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괴롭히고 싸움을 거는 일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는 죄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멀리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악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경우이지요. (물론 이 경우에도 의인을 핍박하는 악인의 마음에는 죄가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갈등의 원인에는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두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과 다툼이 있을 때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원인인지 찾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처럼 내가 죄를 지어서 다툼이 생긴 것인지, 다윗이나 예수님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인지 분명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로 인한 것이라면 회개를 해야 하고, 반대로 의를 위한 것이라면 인내하며 그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사람은 애매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접촉사고가 나면,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주장하지요. 아이들도 친구나 동기간에 다투다가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걸리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불리한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른 이들과 갈등이나 다툼이 생기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상대방이 나빠서, 상대방이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앞에서 말씀 드린 두 번째 경우, 곧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선’이나 ‘의’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시키기가 일쑤입니다. 아주 극명한 예를 들면, 요즘 전 세계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IS(이슬람국가)라는 극단주의 테러단체는 자신들의 악한 테러 행위를 항상 의로운 명분으로 포장하고 미화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박해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요11:49-50).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믿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합리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내가 죄를 품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의로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5장 10절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 즉 여덟 가지 복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여덟 가지로 가르쳐 주고 계신데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의 말씀을 아마도 여러 번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요즈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팔복의 말씀을 하나씩 묵상하며 전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팔복에 나오는 여덟 가지의 복 있는 사람의 유형이 각각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여덟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곧,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애통할 수가 없고, 애통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이 여덟 가지의 측면이 동시에 나타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복 있는 사람의 여덟 가지 유형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팔복의 다른 유형들을 통해서 검증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정된 시간 내에 모든 유형을 다 세밀하게 살펴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은 팔복의 일곱 번째인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 일곱 번째 유형을 선택한 이유는, ‘갈등’과 ‘화평’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이 진정 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내가 의를 추구하기 때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내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인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란

    그러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에 화평, 또는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한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해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폭력과 전쟁을 통해서 ‘평화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사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데, 가장 힘이 센 수사자가 다른 수사자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쫓아내어 무리의 평화를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제사장 가야바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열성적인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와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쫒아냄으로써 얻는 평화는 참된 평화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가정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한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폭력을 아내를 제압하거나, 두 사람이 헤어짐으로써 표면적인 갈등을 잠재웠다면, 우리는 그 가정이 평화로운 가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깨어진 가정이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사자들의 세계와 같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힘으로 억누르거나 쫒아 내서 자기만의 세계를 이룬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화해를 통한 공존의 상태입니다. 앞서 언급한 이사야 65장 25절 말씀과 같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 놀며 공존하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그리고 종말에 회복하실 참 평화입니다. 의로운 다윗은 자신을 질투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그를 살려주고 계속해서 화해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도 화해를 통해 주님 안에서 공존하는 상태, 즉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화해’와 ‘공존’, 이 두 가지가 참된 평화를 나타내는 핵심적인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비결은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45-5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목적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화해의 사건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화해는 이중적입니다. 마치 두 개의 나무를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시켜서 십자가를 만든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죄로 인해 갈라져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길을 놓고, 갈등으로 원수가 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평적인 길을 놓아 화해시킨 평화의 사건입니다. 제가 에베소서 2장 13절-1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받들어 읽겠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이방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 관계에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 둘을 화해시키셔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각각 다른 ‘나’와 ‘너’를 하나로 만듭니다. 원수지간이라도 하나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한 분 아버지께 나아가게 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온전히 거한다면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 나아가 원수된 이들과도 화해하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장차 천국에서는 물론이고, 지금 이 땅에서도 원수가 아니라 형제자매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우리가 다른 이들과, 원수와 화해하지 못하고 갈등과 다툼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 자신이 구원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도 다른 이들과는 불화 가운데 지낸다면, 그는 십자가를 온전히 붙잡지 않고 그저 십자가의 그늘에 한 발만 살짝 걸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리려고 하면서도, 그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희생정신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그것도 모자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루신 방법은 자기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약한 자를 희생시킴으로써 평화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려는 동물이나 악한 인간들과는 정반대가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처럼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권리, 명예, 재산, 심지어 생명까지도 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희생하지 않고 남을 희생시키려 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평화와 안전과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희생’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은 16장 24절과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체면이나 물질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로 철저하게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등이 극심한 곳에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자기 십자가’는 바로 ‘자기희생’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성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찬양 중에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한 번 이상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도와 주소서


이 기도문은 프란체스코가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적으로 정확한 근거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문이 프란체스코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이 기도의 내용과 같은 ‘평화의 도구’로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1181년 지금의 이탈리아에 속하는 아씨시(Assisi)라는 지방에서 한 부유한 비단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프란체스코는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화와는 정반대인 전쟁에 참여하여 세속적인 부와 영광을 꿈꾸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질병을 얻은 후 점차 회심하면서, 한 허물어져 가는 교회당에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무너져 가는 내 집을 고치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비단을 가져다가 팔아 그 돈으로 교회 건물을 고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 모습에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는 아들을 주교 앞으로 끌고 가서 프란체스코가 가져간 돈을 모두 돌려주고, 자신의 상속자로서의 권리까지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프란체스코는 돈을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까지 모두 벗어 주면서 상속자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이후로 가난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 프란체스코가 역사에서 끼친 많은 영향은 이렇게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갈등들은 때로는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의로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그 갈등과 다툼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이란 남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참된 자기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기쁜 맘으로 지는 것, 그것이 자기희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러한 ‘자기희생’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죄가 있다면, 남이 아니라 자신이 회개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남이 아니라 자신이 희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화평을 이루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시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불리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이것이 왜 복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처럼, 나는 예수님을 믿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고 해서 내게 복이라고 말할 만한 뭔가 특별한 이득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그러나 명목상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른다면,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에 걸맞게 사랑과 평화의 삶을 실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칭하면서도 그 신분에 걸맞지 않게 미움과 다툼 속에서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5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목격한 로마 군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b). 이방인인 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칭호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지 않을까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조사에 따르면 많은 세상 사람들이 개신교하면 ‘배타주의’ 또는 ‘공격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개의 자식들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비판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의 잘못으로 그들에게 공격할 탄알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언론을 오르내리고,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기독교인들의 싸움과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화해의 복음’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는데 그것은 ‘화해의 직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제가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받들어 읽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사명을 맡은 ‘화해의 사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이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 55절과 5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격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목격한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화해와 평화의 십자가를 목격한 이 어머니들은 이후 화해의 사도로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분들이 초대 교회에서 감당했을 역할들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여전도회 어머니들께서도 이런 화해의 사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한 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목격해서, 주님의 자기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본받아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일컬어지는 복을 누리는 여전도회 어머니들과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