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바울이]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을 그들도 아나이다." [주께서]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3:19-21)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회심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환상 중에 다시 나타나셨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그의 증언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셨다(행23:18). 아마도 이 때, 다메섹에서 바울을 잡으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사람들도 충동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행9:23-25).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에게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가라고 하신 것은 도피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그릇"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이었다(행9:15, 23:21). 

바울은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가라는 명령에 즉각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임을 그들도 잘 안다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바울은 왜 이렇게 반응하였을까?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현재 변화된 자신이 주님을 증거하면 유대인들에게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떠나가라!"고 촉구하신다. 이 말씀은 단지 예루살렘, 곧 지리적인 장소를 떠나가라는 뜻만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가(Who I was)"를 떠나가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물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 분명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사실이 '오늘 내가 어떤 사람인가'와 '미래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트라피스트 수도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캠브릿지 대학 신입생 시절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방탕한 어제의 머튼'이 수도자로서의 소명을 따라가려는 '회심한 오늘의 머튼'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는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나'에 매여 있는 바울에게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어제의 나'(바리새인, 박해자)의 장소였던 '유대 예루살렘'을 떠나, '내일의 나'(이방인의 사도)의 장소인 '이방'으로 떠나가야했다. 정체성은 장소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가 될까? 나는 어디서 어디로 떠나야 할까?

201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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