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지운 날





또 다시 산부인과에 가는 날

어렵고 어렵게 찾아갔지만

병원 주차장 앞에 멈춰서 

한참 

주저하다가

결국 

예약을 취소하고 차를 돌렸다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아이를

그러면서도 가슴 속 자궁에 

끈질기게 붙여두었던 

얼굴 모르는 아들 딸을

미련없이 보내주기로 했다


난임 부부로 살아온 십여 년을 끝내고

이제 

불임 부부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되지 못해도

오누이처럼 오순도순 살자 했다


패잔병처럼 집에 돌아오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신다

이 년 전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던 내 아버지

퉁퉁 부어오른 손등에 

눈물 쏟으며 맺은 약속이

목구멍으로 넘어와

사진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언제나처럼 아내는 

남편을 위해 열심히 저녁을 준비하고

나도 그 옆에서 말없이 거드는데

한 번도 아기에게 젖 먹이지 못한

불쌍한 여인이 

불쑥 말을 꺼낸다

- 우리가 바르게 결정한 걸까?


때마침 밥솥은 김을 내뿜으며 

배고픈 아기처럼 울고

대답을 모르는 저녁은 

눈치 없이 익어간다


우리는 아이를 지운 것일까

희망을 지운 것일까


201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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