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단상



하나. 카네이션

길거리마다 카네이션이 가득하다. 

영등포역에서 교회로 오가는 길에는 대목을 맞은 상인들이 부지런히 카네이션 바구니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마치 대학시절, 학교 앞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도 매년 이맘 때 쯤에는 수많은 카네이션들로 길가가 채워졌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아주 신중한 얼굴로 이쁜 것을 골라 사가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카네이션을 고르거나, 바구니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저들의 무리에 나도 동참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든다.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멀리 부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KTX가 개통되었다고 하나 부산은 하루에 오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생이 카네이션 증정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어버이날이 되어도 부모님을 찾아 뵙고 꽃 한 송이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죄송하고,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신데도 이렇게 서운하다면, 부모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오죽이나 더 하겠는가? 비록 지금은 학생 때보다는 더 좋은 꽃과 선물을 살 수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지금은 그것이 큰 의미는 없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비록 지금은 비싼 선물을 살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을 때 잘 하자!


둘. 선물

제주선교 답사로 하룻밤 외박을 해야 하는데, 마침 장모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서울에 올라오셨다. 이 기회에 어버이날 선물을 직접 드리기로 하고, 작은 선물을 몇 가지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인 장모님이 들고 다니시기에는 부피가 그리 작지는 않다. 원래 내용이 실속 없을 때 양이 커지는 법이다 ^^: 그리고 아주 당연히 돌아가시는 차표를 마련해 드렸는데, 내려가시는 날 아침 장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방도 작은데 선물을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 자꾸 이러면 부담스러워서 자주 못 오는데…” 그렇다. 장모님은 확실히 부담을 가지고 계시다. 장모님 뿐만 아니라 친부모님도 혹시 필요하신 게 있냐는 질문에, 아예 값싼 한 가지 항목으로 한정지어 대답하신다. 그리고 평소에도 액수를 떠나서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 재정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적잖은 부담을 갖고 계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거의 대부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고 부모님께서 나와 형제들을 위해 시간과 재정을 사용하시는 것을 누려왔다. 어머니께서 나와 식구들을 위해 온갖 집안일을 하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 재정을 지출하시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누려왔다. 그러므로 부모님도 자녀들의 섬김을 부담없이 받으실 당연한 권리가 있으신데도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께서 베푸신 것보다 훨씬 미약한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그 권리를 찾아 누리려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들의 존재가 자식에게 부담과 짐이 될까봐 염려하신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이것이 하늘아래 가장 높다는 부모의 사랑인가?

셋. 전화

5월 7일,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저녁 전화기를 들었다. 8일 아침 일찍 전화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매일 아침 집을 나서기에 바쁜 우리인지라, 아예 미리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직접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전화하는 것이나 직접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부모님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신다. 얼마 전 한 방송사의 ‘효도합시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최소한 일주일에 3번 이상씩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떨어져 있을 때의 전화뿐만 아니라 함께 살 때에도 대화에 참 인색한 것 같다. 많은 시간을 컴퓨터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지만, 부모님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어린아이들이 처음 유치원에 가면, 집에 돌아와서 유치원에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가 물어 보아도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엄마들은 서운함을 느낀다는데,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부모님과 대화를 잘 하지 않고 살아왔다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서운하실까? 특히 부모와 자녀의 대화의 단절은 나아가서 세대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부터라도 부모님과 대화를 위해 시간을 좀더 늘리는 것은 어떨까? 비록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라도 곧 마음을 여실 것이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에베소서 6장 1-3절)


영등포교회 청년1부 <로고스> 칼럼

2004년 5월 8일

'바람소리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맞이 대청소, 봄 수련회  (0) 2004.05.22
준비된 헌신, 계속되는 헌신  (0) 2004.04.25
지름길이 없을 때  (0) 200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