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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이 만난 추억


따뜻한 봄이 되어 바람이 가벼워지니, 저절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풍을 나서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당장은 일상에 매여 있어, 대신 마음에 한가로운 바람(逍風)을 들이는 책 한 권을 펼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청구회 추억》입니다. 

이 글은 선생이 1966년 이른 봄, 한 문학회 회원들과 서오릉으로 다녀온 소풍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소풍 길에서 챙이 뒤틀린 누런 모자를 쓰고, 어울리지 않는 낡은 털실들을 조합해서 짠 스웨터를 입은 여섯 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인연으로 약 2년 반 동안 매월 한 번씩 장충체육관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 함께 어울립니다. 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소한 놀이를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상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청구회”란 바로 이 아이들의 모임에 선생이 붙여 준 이름입니다. 

담담하나 따뜻한 필치로 기록된 이 짧은 회상기에서, 독자들은 1960년대 서울 문화동(현 신당동) 산기슭에 살던 가난한 아이들의 동심을 만납니다. 또한 그 아이들의 친구와 선생이 되어준 저자의 동심을 만나게 됩니다. 옷깃도 마주치지 않고 스쳐지나갈 만한 소풍 길에서 “똑똑치 못한 옷차림”을 한 아이들을 눈여겨보고, 다가가 말을 건네며,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은 저자의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동심입니다. 그는 첫마디를 건넬 때에도 가난한 아이들이 마음 상하지 않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매우 ‘용의주도’하게 질문을 선택합니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이 꼬마들 쪽으로 돌아서며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하고 그 첫마디를 던졌다. 이 물음은 그들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는 질문이다. ‘예’ 또는 ‘아니오’로써 충분한 것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자선의 기회와 긍지도 아울러 제공해주는 질문이었다. 

- 신영복, 《청구회 추억》(돌베게, 2008), 14쪽.

청구회 추억 육필원고 첫장

원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증보판(1998)에 수록된 이 글은, 이후 김세현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들과 조병은 교수의 영어 번역을 곁들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집필 배경은 전혀 모른 채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이야기로만 읽은 독자들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과 에필로그 〈‘청구회 추억’의 추억〉에 이르게 되면 아마도 아주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선생이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에, 수감자에게 제공되는 재생 휴지 위에 몰래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한가롭게 꼬마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글에는 당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이른바 “국민학교 7학년, 8학년” 가난한 아이들의 냉혹한 사회적 현실과, 그 아이들을 향한 선의조차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꼬투리로 왜곡시켜 옥에 가두는 암울한 정치적 현실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저자는 자신의 고교 미술 선생님이었던 김영덕 화백의 〈전장의 아이들〉(1955)이라는 그림에서 보았던 전쟁 속의 아이들의 모습과 서오릉 길에서 만난 그 어린이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곧, 동심과 현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하나로 만납니다. 

전장의 아이들 (김영덕)

그러므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청구회 추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심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맑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억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 속에서 만나는 과거의 이야기, 곧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글로 에필로그를 갈무리합니다.

생각하면 명멸(明滅)하는 추억의 미로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삶 역시 이윽고 또 하나의 추억으로 묻혀간다. 그러나 우리는 추억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추억은 화석과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추억을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6쪽)


Magazine Hub 49 (2017년 5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