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나 설렌다




 

사람의 죽음만큼 쓸쓸하고 서러운 것이 또 있을까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쓸쓸한 것은 이미 먼 여행을 떠난 고인(故人)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가족과 친구들의 뒷모습입니다. 장례식장에 줄지어선 화환들과 북적거리는 문상객들의 발걸음은 그런 쓸쓸함과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어 보려는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간혹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빈소를 만나게 되면 그 쓸쓸함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고 어둡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러면 그 쓸쓸하고 서러운 우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인 백석(1912-1995)쓸쓸한 길에서는 그것이 설렘이라고 말합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1936)에 실린 이 시를 오늘날의 맞춤법으로 일부 수정하여 옮깁니다.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 뒤의 옆 비탈을 오른다

-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 까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 간다

이스라치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동풍(東風)이 설렌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한 사람이 산비탈을 오르는 모습을 마치 수묵담채화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거적장사란 시체를 짚이나 거적에 싸서 장사 지내는 고장(藁葬)을 말합니다. 이름도 나이도 고인과의 관계도 감추어져 있는 그 사람은 역시 이름도 성별도 없는 시신을 장사 지내기 위해 거적에 말아 등에 지고 홀로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산 까마귀만 울며 날고, 주인 없는 개 한 마리가 어정어정 따를 뿐입니다. 보통 꽃상여가 앞서가고 그 뒤를 만장과 수많은 사람들이 애통하며 뒤따르는 전통적인 장례 행렬과 비교하면 그 쓸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이러한 쓸쓸함은 백석에게는 얼른 떨쳐 버려야할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어진 근원적 정서입니다. 시인은 그의 다른 작품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가난하고 쓸쓸한 이들은 하늘로부터 버림받거나 외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에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이라는 선언이 산울림처럼 쓸쓸한 가슴속에 울립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 쓸쓸한 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온 자연세계가 거적장사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시신을 뒤따르며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하늘을 나는 산 까마귀가 구슬프게 울어 주고 있고, 도적개가 어정어정 슬프게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알간 이스라치(산앵두)와 보랏빛 머루가 마치 전(), 곧 제사상에 음식을 차려 놓은 것처럼 산비탈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에 하얀 솜털이 난 수리취와 땅버들은 마치 상복을 입은 유족들과도 같이 서러워하며 장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쓸쓸한 길을 오르는 거적장사는 매우 쓸쓸하고 쓸쓸하나 역설적으로 결코 쓸쓸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이름 없고 쓸쓸한 한 사람의 죽음과 그를 장사 지내는 사람을 매우 귀히 여기고, 자연세계를 통해서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마지막 행에서 시인은 뜨물처럼 흐린 날 하늘에다 동풍, 곧 봄바람을 그려 넣으며 시를 맺습니다. 비록 지금은 흐리고 추운 날이지만 머지않아 따스하고 맑은 봄이 오리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발표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그 봄은 민족의 해방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처럼 쓸쓸함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깊이 내린 시인은 그 밑바닥에서 설렘과 희망을 길어 냅니다. 그러므로 쓸쓸함을 얼른 벗어나려고 손에 쉽게 잡히는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이나 친구들과의 수다로 급히 달아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만들었다는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설레는 동풍이 나의 피부를 뚫고 내 마음속까지 불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Magazine Hub 58 (2018년 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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