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149:1-9

 


정의로우신 하나님,

 

즐거운 노래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이 시편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두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찬양입니다. 먼저 새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는 물론(1), 자신의 침상, 또는 의자(couch)에서까지(5) 왕 되신 주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이 된 저희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특히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기 어려운 요즘, 저희들은 각자의 침대에서, 소파에서, 식탁이나 책상 의자에서, 그리고 바닥에 앉아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라는 구절을 상상 속에 그려보니 마치 음악의 불협화음을 들은 것처럼 신경이 거슬립니다. 어떻게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손으로는 양날을 가진 칼을 들고 원수들에게 복수를 시행할 수 있습니까?(7-8) 오히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까? …… 이 모순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9)라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저희가 스스로 억울함이나 원통함을 풀기 위해, 또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복수의 칼을 휘두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정의로운 판결을 그대로 시행하라는 것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저희는 주님의 정의를 시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데, 오히려 겟세마네 동산의 베드로처럼 스스로 심판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계획,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의 기분에 따라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왔습니다. 신랄하게 비난하고, 험담하고, 분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불의에 대해서는 원수 사랑과 평화 조성이라는 핑계로 못 본 체 하거나 묵과해온 비겁함과 나태함을 회개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관이었으며, 평화가 아닌 회피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의 종교적인 권익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세상에 만연한 악과 사회적 구조 속에 내재화된 불의에 대해서는 둔감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의 신음과 비명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이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정의의 칼은 칼집에만 꽂아 두고 팔짱을 끼고 있었던 모순된 신앙생활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주님,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4:12).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예리한 칼인데, 이 말씀을 겟세마네 동산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변덕스러운 기분으로 분별없이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의 칼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휘두르는 칼에 자신들이 베이고 말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제가 이처럼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종, 스스로를 속이는 악당, 사기꾼과 같은 설교자, 사이비 교주와 같은 거짓 목자가 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옵소서. 거룩한 무리들의 모임 중에서, 그리고 침상에서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빚어 주시고, 손에는 양날을 가진 칼을 들고 주님의 의로우신 판결을 시행하는 정의의 도구로 살게 하소서.

 


2020.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