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생일

 

 

빗속에서 생일을 맞으며
내가 생명을 빚졌음을 기억한다

핏덩이로 세상에 나와 탯줄이 끊긴 뒤
내 어머니와 나의 아내와
수많은 사람들이 해준 밥을 먹고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 밥을 위해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마트에서 땀을 흘렸고
졸음과 싸우며 도로 위를 달렸으며
밭과 들에서 거친 땅을 팠고
바다 위에서 무서운 파도와 싸웠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하늘에서 햇빛과 비를 내려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게 하였다

아직 어두운 새벽, 빗속에 생일을 맞으며
평생 값을 수 없는 엄청난 빚 속에
밥알별들로 이루어진 은하수의 빛 속에 있어
새삼 부끄러워하며 슬며시 운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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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물처럼 진솔하고, 겸손하며,

관대하고, 담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0년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던 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두물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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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6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회 | 온라인(www.praxis.or.kr), 2019년 6월 20일.


남기정의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과 칸트 이후 인식론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찬

 

 

권혁일

 

간혹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는다. 이처럼 하나님 인식과 관련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s)은 학문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목회적인 주제다. 남기정 박사는 목회자와 연구자로서 영적 감각론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천착해 왔다. 특히 그는 고대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Macarius of Egypt: 300-391)의 영적 감각론과 근대 영국 신학자 겸 목회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영적 감각론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남기정 박사가 오늘 발표한 짧은 소논문에 영적 감각에 대한 그의 많은 지식과 통찰을 압축해서 담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본 논찬에서는 발표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에 발표문에서 분량의 제한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내용들을 명료화하고 확대하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남기정 박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후의 현대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적 감각에 대한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그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발표자에 의하면, 본체(noumena)와 현상(phenomena)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칸트의 형이상학은 지식과 탐구의 한계를 [육체적] 감각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신적 계시, 신성과의 대면과 연합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는 신학과 영성분야에 커다란 허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칸트적인 분리는 서구의 17세기, 18세기의 지성적 활동을 종합한 것이며, 현대 신()인식론적 딜레마를 고착시킨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발표자는 현대 신인식론의 주요한 두 축을 로크주의적’(Lockean) 길과 바르트적’(Barthian) 길로 분류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의 견해를 따라, 두 가지 길 모두 신적 경험에 있어서, 신자들의 경험과 비신자들의 경험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신앙의 깊이 차이, 그들의 신과의 친밀함의 차이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신인식의 차이에 대해 의미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대 신인식론의 딜레마는 본체와 현상, 혹은 초월과 내재, 혹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상정하며, 주체의 특성과 잠재력을 간과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적시한다.

이러한 논의를 배경으로 남기정 박사는 사라 코클리가 초대 교부들의 영적 감각 사상을 바탕으로 제시한 현대 신인식론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들을 잣대로 존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이 이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은 통시적으로는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공시적으로는 당대의 이성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웨슬리의 사상에서 영적 감각이란 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인간의 감각이다. “인간의 통상적 인식 능력이 실은 상당히 실추된(失墜~, deteriorated) 상태에 있어서, 현재의 인간의 인식은 물질계에만 국한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작용으로 영적 감각이 활성화되어 인식 능력이 회복되면, 사람은 초자연적 세계, 신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한 진정한 영적 경험을 위해서는 영혼의 정화와 성숙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발표자는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 즉 마음과 감각의 새로운 탄생, 변형, 진보, 정화를 강조하고 한 사람의 영적 여정에서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사상은 신적인 실재와의 소통과 대면과 연합의 경험을 말하는 영적 인식을 이해하는 약점을 보이던 현대 인식론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데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힘주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남기정 박사의 연구는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고, 그 가능성과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신자들과 목회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학회의 주제어인 미디어 시대는 감각적 즐거움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미디어의 발달과 확장이 어우려져 눈에 보이는’(visible) 쾌락이 우상처럼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지배하는 때다. 이러한 때에 이성 또는 과학이라는 합리적인또는 계몽된눈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invisible) 신을 눈에 보이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으로 축소시켜 인간의 감각과 사고의 틀 속으로 쑤셔 넣으려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여전히 초월적 세계와 영적 감각을 주장하는 고지식한남기정 박사의 연구는 오늘날 눈에 보이는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들, 심지어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까지 회심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논찬자의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발표문에서는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이라는 주제를 붙인 것과 서론에서 동영상 매체, 가상현실, 증강 현실까지 동원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이 사람들의 영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 것을 제외하고는 본문과 결론에서는 미디어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발표자는 연구의 목표를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고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 중에서도 현대의 신인식론과 웨슬리의 영적 감각론으로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였지만, 이와 같은 연구가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에 주는 의의가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다음으로 발표자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영적 감각이란 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인간의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정의만 본다면 악의 영향력 아래서 실추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인식 능력, 또는 감각은 영적 감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적 감각들의 깨어남과 성숙또는 정화와 활성화를 주장한 대목에서는 인간에게 영적 감각은 새로운 탄생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웨슬리는 인간에게 영적 감각은 언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지식이나 훈련을 통해 후천적으로 계발된 것인가?

아울러 발표자는 웨슬리는 이러한 감각과 인식의 변형과 점진적인 발달과 성숙을 위해서는 신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성령과 협력하는 정화의 노력과 규칙에 따라 훈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아직 영적 감각의 깨어남·활성화·변형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식 능력이 실추된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신적인 것에 대해 헌신하고, 규칙에 따라 훈련하도록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복음의 선포나 교육을 통해 습득된 지식인가? 아니면, 그런 사람도 자신의 의지나 훈련과 관계가 없이 수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일종의 계시 사건, 또는 영적 경험을 부분적, 단편적으로라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 다른 말로, 영적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탄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영적 감각이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는데, 실추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영적 체험 또는 지식을 얻어서 회심하고 새로운 탄생을 경험할 수 있는가?

또한 남기정 박사는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은 칼빈의 divinitatis sensum과 같은 근대 초기의 정적(靜的, static) 영적 인식론과의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정론적 결정론과 대조적으로, 웨슬리는 영적 감각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모든 사람의 영적 감각은 새롭게 각성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웨슬리는 새롭게 깨어난 영적 감각은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깔뱅 연구자들 중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깔뱅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신적 감각/지각(divinitatis sensum, I.iii.1) 을 이야기한 것은 당대의 종교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변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모든 사람들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나 거부를 변명할 수 없음 논증하기 위해서다(1:19; 2:14-15). 그래서 그는 영적 감각에 대한 사상을 정교하게 발전시키거나 설명하지는 않았다.

비록 신적 지각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본래적인 상태와 왜곡된 상태를 구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표자의 견해처럼 깔뱅이 인간의 인식의 기능을 고정 불변한 것으로 간주했다거나 순간적인 도약이 일어나는 분리적인 단계로 생각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깔뱅은 신적 지각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성향이 자라나는” “씨앗과 같으며(I.iii.2), 그러한 종교의 씨앗이 모든 사람 안에 신적으로 심기워졌음을 경험이 증명한다”(I.iv.1).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안에는 신적 지식의 씨앗이 처음부터 기이하게 심겨져있다(I.v.15). 씨앗이란 점진적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이다. 또한 깔뱅 신학에서 칭의를 통해 의롭다고 선언된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자라가야 한다. ,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논찬을 마치며, 영적 감각과 신인식론에 대한 좋은 연구로 배움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남기정 박사께 깊이 감사드린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주제는 학문적으로만이 아니라 목회적,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이므로, 이 주제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더욱 깊어지고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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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기차의 말



덜컹덜컹 밤기차 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 온다 -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덜컹덜컹 토닥토닥 

잠시 내게 몸을 맡기고 쉬렴 
대신 내가 열심히 달릴 테니

차창 밖 무심한 야경은 
무심한 여행을 위한 내 선물이란다

참, 간혹 상행 기차가 휙휙휙 스쳐지나가도
뒤돌아보지는 말길 
소금 기둥이 될지도 모르니
 
오늘밤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자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어머니의 집으로

 

더얼컹 덜컹



2020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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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 내가 깨어나

시편 139편

 

〈레주렉시(Resurrexi)는 시편 139편의 구절들을 편집해서 만든 오래된 라틴어 찬송이자 기도다. 누가 언제 이 찬송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7-8세기에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대 로만 챈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문서상으로는 《트렌트 사본》(Trent codices)으로 불리는 15세기 악보집에 이 곡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가톨릭에서는 이 챈트를 부활절 미사 때 입당송으로 부르고 있고, 다른 전통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아래에 이 곡의 라틴어 가사와 한국어 번역을 소개한다. 참고로, 시편 139편 18절 하반절을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내가 깰 때에도(when I awake)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내가 깨어났다. 그리고(I awake and ...) 또는 내가 일어났다. 그리고(I am risen and...)에 더 가깝다. 그래서 〈레주렉시는 시편 139편을 부활의 관점에서 읽고 노래한다. 

 

Resurrexi 

 

(The Introit for Easter Day)

Resurrexi, et adhuc tecum sum, alleluia.

posuisti super me manum tuam, alleluia.

mirabilis facta est scientia tua, alleluia.

 

Domine, probasti me, et cognovisti me;

tu cognovisti sessionem meam, et resurrectionem meam.

 

제가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알렐루야!

당신께서 제게 안수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당신의 지식은 가장 기이합니다, 알렐루야!

 

오, 주님, 당신은 저를 찾으시고, 저를 아셨습니다.

당신은 제가 앉는 것도 아시고, 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십니다.

 

from 시편 139:18, 5-6, 1-2.

 

상상력을 좀 더하여 가사를 묵상하면, 주님께서 어둠 속에 누워 있는 나를 찾아 내시어, 내 위에 손을 얹으심으로 나를 깨우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어,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장면이 떠오른다. 깜깜한 무덤 속에 누워 있는데, 무덤을 막은 커다란 돌이 굴려지고, 빛이 들어와 흑암이 사라지며, 그 빛이 죽어 있던 나를 깨운다. 주님의 부활 이야기가 나의 부활 이야기가 된다.

 

매일 아침 맞는 새벽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맞게 될 부활의 새벽을 맛보게 한다. 밤새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의식이 돌아 오는 순간, 창을 통해서 빛이 방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시편 기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님, 지금 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아침 빛은 단지 내 눈으로 들어와 시각적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시는 것이(시 139:5) 직관적으로 인식된다. 이렇게 매일 아침 빛 속에서 나를 깨우시고 현존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때 부활이 그저 먼 미래에 일어날 가능태(可能態)가 아니라, 지금 나를 살리는 현실태(現實態)로 경험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먼 미래에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다.

 

혹시 지금 내 삶이 흑암 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는 밤과 낮이 같고, 흑암과 빛이 같아서(시 139:11-12), 흑암 속에 있는 나를 찾아내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쁘게 노래할 수 있다.

 

여기에 공유하는 영상은 미국 켄터키에 소재한 겟세마니 수도원(The Abbey of Gethsemani)의 수도자들의 노래와 수도원 풍경이 담긴 영상이다. 이곳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 1915-1968)이 살던 곳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풍경들은 수도자들이 부르는 〈레주렉시와 함께 겨울을 이기고 찾아온 봄처럼 죽음을 이기고 찾아오는 부활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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