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 내가 깨어나

시편 139편

 

〈레주렉시(Resurrexi)는 시편 139편의 구절들을 편집해서 만든 오래된 라틴어 찬송이자 기도다. 누가 언제 이 찬송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7-8세기에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대 로만 챈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문서상으로는 《트렌트 사본》(Trent codices)으로 불리는 15세기 악보집에 이 곡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가톨릭에서는 이 챈트를 부활절 미사 때 입당송으로 부르고 있고, 다른 전통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아래에 이 곡의 라틴어 가사와 한국어 번역을 소개한다. 참고로, 시편 139편 18절 하반절을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내가 깰 때에도(when I awake)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내가 깨어났다. 그리고(I awake and ...) 또는 내가 일어났다. 그리고(I am risen and...)에 더 가깝다. 그래서 〈레주렉시는 시편 139편을 부활의 관점에서 읽고 노래한다. 

 

Resurrexi 

 

(The Introit for Easter Day)

Resurrexi, et adhuc tecum sum, alleluia.

posuisti super me manum tuam, alleluia.

mirabilis facta est scientia tua, alleluia.

 

Domine, probasti me, et cognovisti me;

tu cognovisti sessionem meam, et resurrectionem meam.

 

제가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알렐루야!

당신께서 제게 안수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당신의 지식은 가장 기이합니다, 알렐루야!

 

오, 주님, 당신은 저를 찾으시고, 저를 아셨습니다.

당신은 제가 앉는 것도 아시고, 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십니다.

 

from 시편 139:18, 5-6, 1-2.

 

상상력을 좀 더하여 가사를 묵상하면, 주님께서 어둠 속에 누워 있는 나를 찾아 내시어, 내 위에 손을 얹으심으로 나를 깨우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어,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장면이 떠오른다. 깜깜한 무덤 속에 누워 있는데, 무덤을 막은 커다란 돌이 굴려지고, 빛이 들어와 흑암이 사라지며, 그 빛이 죽어 있던 나를 깨운다. 주님의 부활 이야기가 나의 부활 이야기가 된다.

 

매일 아침 맞는 새벽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맞게 될 부활의 새벽을 맛보게 한다. 밤새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의식이 돌아 오는 순간, 창을 통해서 빛이 방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시편 기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님, 지금 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아침 빛은 단지 내 눈으로 들어와 시각적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시는 것이(시 139:5) 직관적으로 인식된다. 이렇게 매일 아침 빛 속에서 나를 깨우시고 현존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때 부활이 그저 먼 미래에 일어날 가능태(可能態)가 아니라, 지금 나를 살리는 현실태(現實態)로 경험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먼 미래에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다.

 

혹시 지금 내 삶이 흑암 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는 밤과 낮이 같고, 흑암과 빛이 같아서(시 139:11-12), 흑암 속에 있는 나를 찾아내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쁘게 노래할 수 있다.

 

여기에 공유하는 영상은 미국 켄터키에 소재한 겟세마니 수도원(The Abbey of Gethsemani)의 수도자들의 노래와 수도원 풍경이 담긴 영상이다. 이곳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 1915-1968)이 살던 곳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풍경들은 수도자들이 부르는 〈레주렉시와 함께 겨울을 이기고 찾아온 봄처럼 죽음을 이기고 찾아오는 부활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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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나셨다

He Is Risen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지음

권혁일 옮김



이 글은 토머스 머튼(1915-1968)19679월에 쓴 에세이 “He Is Risen”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의 사후인 1975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Argus Communications에서 소책자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후 The Merton Annual 9 (1996)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그가 살아나셨고, 그는 여기에 안 계신다. 그분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는 중이다.”(16:6-7)[각주: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움직이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같은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묘[각주:2]에서 드리는 예배the Holy Sepulchre cult는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일 때에만 그리스도교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오직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조건 아래에서만 타당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이동한다는 조건, 우리가 아직 가있지 않은 곳으로 가시는 그분을 기꺼이 따라 간다는 조건,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 곳으로 그분을 찾으러 간다는 조건, 갈릴리로간다는 조건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한 것을 믿도록, 단지 이것만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생명은, 이 활력은 사랑과 만남의 힘으로 표출됩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고, 상호 만남과 상호 헌신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이 미래를 함께 세웁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라 불립니다. 그 나라는 이미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현재적인 실재reality입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를 함께 건설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그분과 함께 협력합니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교회의 메시지입니다. 단지 부활주일에만이 아니라 연중 매일, 그리고 매년,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교회는 이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부활절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활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증명하려고 애써야할 교리가 아닙니다. 또는 논쟁해야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이자 행동입니다.

이러한 진리들 위에 자신의 전 삶을 세우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전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만난 것처럼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압니다. 그러한 만남은 꼭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인격적/개인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세례는 이와 같은 만남의 확증이자 표시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이어지는 그리스도와의 만남들 속에서 반드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 성찬 안에서, 그리고 다른 성례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과 들음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선포된 것임을 깨닫는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러한 만남들 속에서 세례가 반드시 실제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우리가 그곳에 있는 것조차 몰랐던 무언가를 깨웁니다.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해방시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던 힘입니다. 그것은 소망이며, 삶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또한 그것은 회복력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일어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능력이며, 창조적 변형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패배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파괴하려고 하거나 우리의 인간적 그리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려는 모든 것들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활절기에 진행되는 일련의 행사들을 통해 우리의 안에 있는 죽음과 생명의 결투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격렬하고 필사적인 싸움입니다. 우리 안의 삶과 죽음의 전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에 대항하는 인간의 절망이 벌이는 전쟁입니다.

다시 살아난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죽어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전에는 그와 함께 부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조적 변형의 역동에, 부활과 갱신의 역동에, 사랑의 역동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입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정녕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며 인간적 편견의 제한과 금기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히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단지 그가 더 높은 법칙, 곧 은혜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아도 되며,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는 모든 미신들, 모든 맹목적인 금기들과 종교적 허식들, 사실상 공허한 율법주의의 모든 형식들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언제 다시 읽어보십시오. 완전한 갱신을 향한 교회의 부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는 반드시 인기 없는 일들에서조차도 과감히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다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생각하기에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그가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다른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이룬 업적 때문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은혜로 부르심을 받는다.”[각주:3] 이 진술은 그리스도인의 열등의식을 효과적으로 없앱니다. 그 열등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도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성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군중의 의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군중 속에 숨고, 군중과 함께 달립니다. 심지어 그 군중이 폭도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혼자라고 느끼고, 도덕적으로 벌거벗었다고 느끼곤 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느낌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감히 군중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겸손해서 홀로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에 주의를 기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는 종종 제도화된 인간 권력 구조가 내세우는 목적과 계획에 정반대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면, 우리는 수난의 외로움 속에 계신 그분의 곁을 과감히 지켜야 합니다. 마치 현대 국가가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에게 등을 돌리는 것처럼, 모든 기득권층이, 즉 종교적 기득권층과 사회적 기득권층 모두가 그분을 향해 등을 돌릴 때도 말입니다. 사실상 사도들 중에는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유대 정치의 극좌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 지망자a would-be freedom fighter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심문과 처형을 공부한다면, 그분이 정죄된 죄목이 바로 그가 합법적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가, 체제전복적인 급진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철저히 모든 유대 정치 집단들의 바깥에 서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정치적 혁명 운동으로 보이도록 왜곡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위한 투사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형태의 폭압, 모든 형태의 지배 성령, 사랑의 법,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를 제외한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의 지배 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셨는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이 싸움에서 절정을 이루는 전투였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성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칭송하며 한 다음과 같은 말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로 자유 안에 머물게 하려고 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51)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을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어떤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적 과도함religious overkill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뿐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제의적 관습들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리스도교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자신들은 유대교의 율법 준수를 통해서 여전히 보호받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과도함은 우리 시대의 세상에서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단순히 존재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는 부와 권력의 편에 서는 것에 대한 정당화와 지지를 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문자적으로 과도함의 종교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적들을 완전히 씨가 마를 때까지 파멸시킵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 그는 이 일에 방해가 되는 신약성서의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들은 모두 [고의로] 잊어버립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방종에 굴복할 위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종은 성령과 정반대되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5:14-16).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리될 수 없는 자기 부인의 엄격함을 서술해 나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들을 모두 준수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우리가 종교적 영웅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고통하고 분투하는 인간들이며,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죄인들이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죄수들이고, 우리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모욕하는 권세들에 대항하여 영적 무기를 든 반항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도움 없이도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우리를 그분 주위로 모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그 전투로부터 도망치며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렸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매우 암시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핵심과 중심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 체험은 종종 사도들과 다른 부활의 증인들의 체험의 패턴을 따라갑니다.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진 활력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은 모든 부활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무덤으로 간 여인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분의 몸을 방부 처리하는 것, 오직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그녀들이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운 돌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시신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돌을 굴려 줄 누군가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삶에서도 발견되는 일종의 정신적 패턴입니다. 우리도 너무나도 자주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입술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가 죽었다고 몰래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대한 돌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그분의 시신에 접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의 시신의 종교cult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는 우리가 그분에게 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돌을 옮기는 문제로 인한 분노와 절망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진정 살아있는 신앙이기를 그치고 그저 율법주의적이고 제의적인 형식이 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대신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형식적 숭배일 뿐입니다. 그러한 죽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와 빛으로서 여겨지지 않고, 일종의 신성한 ’, 대단히 거룩한 물건object, 신학적 유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빛을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해버린 결과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가까이 계신 살아계신 주님의 강력한 임재 대신에 우리는 경건한 이미지들과 추상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구조를 세워서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최소한 그분은 송장 같은 밀랍 인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서 이 움직이지도 않는 물체를 숭배하고, 온갖 종류의 향유로 방부 처리를 하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이 강력한 마술로 당신을 부유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종교적 생각들과 습관들과 전례들과 관습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보다 우리에게 더 실제적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모든 종교적 액세서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의 길을 방해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 사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종교적 법을 철저히 준수하던 때를 회고하며, 그러한 경건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원했습니다. 여기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얻는 최고의 유익보다 더 대단한 것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들을 쓰레기와 같이 여기고 그것들을 잃어도 좋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완전만을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전부는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또한 그분의 죽음의 본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고통에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11)

거룩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돌이 굴려져 옮겨졌다는 사실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예수의 몸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호한 종교적 문제들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묘석墓石 뒤의 죽은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 돌을 굴려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아니며, 생명 없는 물건도 아닙니다. 소유물의 일부도 아니며, 심히 종교적인 가보heirloom도 아닙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활, 그리스도교 예배, 그리스도교 공동체, 성찬, 이 모든 것들이 한정된 제의적 경건에 의해 모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경건은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가 시신인 것처럼, 거룩한 물체인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 부활하신 구세주의 잔치, 곧 어린양의 잔치에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생명의 떡으로 나아갑시다. 이 떡은 죽은 자의 음식이 아니라 참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잔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앞서 그의 나라로 가십니다! 할렐루야!





  1. 옮긴이 주 | 이 글에 직접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저자가 읽었던 성경 번역본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모두 원문에 나오는 영어 성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들이다. 머튼은 Jerusalem Bible (1966)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주 |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터에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는 주후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왔다. 그리스어로 된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은 “부활의 교회”(Church of the Anastasis)다. [본문으로]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n.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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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핀 꽃

 

아침 햇살 넘실거리는 

도시 속 꽃밭은

찬란한 

빛의 바다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그대가 저벅저벅

소리없이

걸어오니

 

나도 꽃이 되면

행복한 튤립처럼 

햇살 가득 

품에 안을 수 있을까?

 

그렇게 

단 하루를 살다가

밤이 되면 

이름도 없이

바다에 스려져

반짝이는 빛망울이

될 수 있을까?

 

202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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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 호흡과 생각

시편 146:4

 

생각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는 생각이 참 많습니다. 혼자 있으나, 다른 누구와 함께 있으나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습니다. 깨어 있는 동안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는 자다가도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생각 없이 욕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경멸하고,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오늘 제게 사뭇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허무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의 일상과 삶을 뒤흔드는 코로나바이러스19는 이번 봄을 준비하며 세웠던 계획들을 모두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마치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겨우내 피워내었던 꽃이 후두룩 떨어지듯, 오랫동안 매우 진지하게 몰두했던 생각들, 계획들이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아마 언젠가 제가 이 땅에서 마지막 호흡을 내쉬는 순간 저의 모든 생각들, 계획들도 소멸되고 말겠지요. 만약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저의 생각은 호흡보다도 먼저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에서 배운 주님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저희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시고(8:4), 주님의 생각은 저희 마음에 보배로우시며(139:17),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40:5). 또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주님의 생각은 저희의 생각보다 높다고 하셨지요(55:9). 주님, 부디 유한하고 낮은 저의 생각이, 무한하고 높은 주님의 생각 안에 있도록 사로잡아 주시옵소서. 제가 생각에 빠져 함께 하는 사람들 안에, 이 자연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 살지 않도록 생각에서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도록 날마다 제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의 모든 호흡과 생각이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2020.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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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149:1-9

 


정의로우신 하나님,

 

즐거운 노래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이 시편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두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찬양입니다. 먼저 새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는 물론(1), 자신의 침상, 또는 의자(couch)에서까지(5) 왕 되신 주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이 된 저희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특히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기 어려운 요즘, 저희들은 각자의 침대에서, 소파에서, 식탁이나 책상 의자에서, 그리고 바닥에 앉아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6)라는 구절을 상상 속에 그려보니 마치 음악의 불협화음을 들은 것처럼 신경이 거슬립니다. 어떻게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손으로는 양날을 가진 칼을 들고 원수들에게 복수를 시행할 수 있습니까?(7-8) 오히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까? …… 이 모순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9)라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저희가 스스로 억울함이나 원통함을 풀기 위해, 또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복수의 칼을 휘두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정의로운 판결을 그대로 시행하라는 것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저희는 주님의 정의를 시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데, 오히려 겟세마네 동산의 베드로처럼 스스로 심판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계획,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의 기분에 따라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왔습니다. 신랄하게 비난하고, 험담하고, 분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불의에 대해서는 원수 사랑과 평화 조성이라는 핑계로 못 본 체 하거나 묵과해온 비겁함과 나태함을 회개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관이었으며, 평화가 아닌 회피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의 종교적인 권익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세상에 만연한 악과 사회적 구조 속에 내재화된 불의에 대해서는 둔감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의 신음과 비명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이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정의의 칼은 칼집에만 꽂아 두고 팔짱을 끼고 있었던 모순된 신앙생활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주님,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4:12).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예리한 칼인데, 이 말씀을 겟세마네 동산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변덕스러운 기분으로 분별없이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의 칼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휘두르는 칼에 자신들이 베이고 말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제가 이처럼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종, 스스로를 속이는 악당, 사기꾼과 같은 설교자, 사이비 교주와 같은 거짓 목자가 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옵소서. 거룩한 무리들의 모임 중에서, 그리고 침상에서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빚어 주시고, 손에는 양날을 가진 칼을 들고 주님의 의로우신 판결을 시행하는 정의의 도구로 살게 하소서.

 


2020.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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