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본문과 묵상 안내를 옮겨 놓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실제 안내를 받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실천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공유하는 유투브 동영상의 설명란에 기록된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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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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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떠나가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치 집단이었는데, 그 수는 많지 않았으나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을 때에 영혼이 육체와 함께 소멸된다고 믿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한 불순한 질문을 가져와서, 부활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요 5:29 참조). 구체적으로 그들은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규정된 이른바 ‘형사취수제'와 관련해서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며, 부활 사상은 모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나다고 주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묘한 질문을 던지는 사두개인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오히려 그들이 무지로 인해 잘못된 길로 빠져 헤매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오직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 있음을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두개인들의 무지, 곧 그들은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신봉하고 절대시하던 모세오경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 부활하면, 이 땅에서의 부부 관계가 그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하였으나,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이나 제도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의 추측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오간 이 대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나는 사두개인들처럼 자신의 무지와 고집에 갇혀서 다른 이를 비판한 적은 없습니까? 당파적 신념이나 이익에 매여서 다른 이들을 적대시한 적은 없습니까? 마음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이나 감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며,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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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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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예수를 권위로 누르려고 왔다가 오히려 할 말이 궁색해져 돌아간 유대 지도자들은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내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었던 헤롯 가문을 지지하는 헤롯당은 친로마적이지만,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반제국적이며 유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제국에 내야하는 세금에 대해 매우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자신들의 공통의 적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막 3:6 참조). 예수님을 찾아간 그들은 먼저 몇 가지 말로 아부를 한 뒤, 세금에 관해 질문하고, 예수님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명백하게 답변하라고 은근히 촉구하였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은 주후 6년 경에 제정된 인두세로서 식민지 백성들이 로마 제국에 내는 조공세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이 세금을 내야하는지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대답하신다면, 주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지거나 심지어 우상숭배자라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금을 내는 데 사용된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형상과 더불어 그를 신성화하는 문구가 함께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을 하신다면 주님은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정치범으로 고발을 당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대답하기 어려운 교묘한 질문을 던졌으나, 주님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답변으로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넘어가셨습니다. 이때 “바치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돌려주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동사입니다. 2세기 후반과 3세기 초반에 살았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말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의 대답은 그저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시기 위한 말재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 사이에서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여러가지 논란들이 있습니다. 그 논란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도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새겨진 형상이 무엇인지 알고, 그 형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그 대적자들 사이에서 오간 이 대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마음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이나 감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며,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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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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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 부분의 유대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당신께서 가지신 권위의 원천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그 권위는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서 솟아나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를 만들었다 말씀하시며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부적인 묘사는 이사야 5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노래’를 상기시킵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과 청중들은 이사야의 그 예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부른 ‘포도원의 노래’에서는 포도원 자체가 문제여서 가장 좋은 나무를 심어도 나쁜 열매밖에 맺지 못했지만,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소작농으로서 주인에게 당연히 바쳐야 할 소출의 일부를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였으며, 심지어 아예 포도원을 빼앗을 생각으로 그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그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을,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뜻합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에 대한 지적은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양심의 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뻔뻔한 성전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참 선지자로 여기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이를 갈며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부에서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며, 당신께서는 다윗의 계통을 잇는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시편이 기록된 히브리어로 보면, ‘돌’을 뜻하는 ‘에벤’이라는 단어는 ‘아들’을 뜻하는 ‘벤’이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은 농부들에게 죽임 당한 아들과 서로 통합니다. 성전 기득권자들은 청지기로서의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하고 종교 권력과 기득권을 사유화하기 위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 돌과 같이 사용하셔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기득권자들은 포도원 농부들과 같이 진멸 당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맡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예수님 당시의 성전 기득권자들과 같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과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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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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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거니시는 모습을 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님께 몰려왔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전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던 상인들을 모두 내쫓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상인들이 성전뜰에서 장사하도록 허락한 것이 바로 성전 관리를 맡은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비판이 자신들을 향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발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다가가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처럼 ‘제도적인 권위’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변방 갈릴리에서 올라온 불온한 인물 예수를 권위로 짓밟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공격에 주눅들기보다 오히려 역질문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권위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유대 지도자들은 뻔뻔하게 ‘모른다.’라고 대답하며 차라리 자신들의 무지를 노출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리를 따르기보다 사람들을 두려워c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그러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곤란한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온 참된 권위는 스스로 그 진정성을 나타내 보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나, 예수님의 사역은 그 어떤 증명이나 해명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위 있는 일이었음을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제도적 권위에 매여서,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을 두려워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진정한 권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오간 이 대화가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혹시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부분이나 반대로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평소 권위에 대해서 어떤 태도나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내가 추구하거나 거부하는 권위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시는 생각과 감정을 주님께 말씀 드리고 깊이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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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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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5절에는 ‘기도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22절부터 24절에 기록된 ‘기도와 믿음’에 대한 가르침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지만 내용이 서로 연관성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하셨던 말씀인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이 위치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혐의가 있거든, 또는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그를 용서하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나의 행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용서하시게 만든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우리가 받은 용서를 동료 인간들을 대상으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어떤 고대 사본들에는 오늘 본문 25절 뒤에 다음과 같은 26절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25절에서는 너희가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긍정문을 사용한 부드러운 권고였다면, 26절은 너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부정문을 사용한 강력한 권고입니다. 용서를 권하는 긍정문과 그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부정문으로 이루어진 25절과 26절은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에도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하게 실려있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11장 25절이 독특한 점은 “서서 기도할 때에”라는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간혹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보통은 서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서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자가 하나님을 향해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동료 인간들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기까지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혹시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아직 내가 실천하지 못한 용서가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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