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을 괸 남자

-마태복음 17장 27절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길거리에

한 남자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앉았다

쭈글쭈글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으니

얼굴의 주름살이 더욱 깊어진다

행인들의 동정을 바라고 놓아둔 컵은

무관심 속에 비어 있다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져 있는 그가

낯설지 않다


동전을 기대하며 

턱을 괴고 복음서를 읽는 나

값싼 위로가 던져지기보다 

값비싼 비움이 채워진다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남자


2013. 3. 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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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3. 주일



교회 다녀와서 '차려 입은' 것을 활용해 뒤늦게 '결혼기념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지금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있는 학교 건물 앞. 지나가던 경비 아저씨가 보고 씩 웃고 지나간다. 쑥쓰럽게.


몇 년 전부터 매해 결혼기념일마다 사진을 찍어 남기자고 아내와 약속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사진기 앞에 섰다. 새롭게 결혼하는 마음으로.  9년 전 결혼 사진을 찍을 때와 비교하면, 마음이 참 편안하네. 시간이 그냥 흘러 간 게 아니다. 





우리가 결혼하던 날 한국 날씨는 여전히 추운 늦겨울이었는데, 지금 미국은 초봄이다. 날씨처럼 우리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숙하고 있는 걸까? 사진기 앞에서 자세를 잡을 때보다 촬영을 마치고 정리를 할 때 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잡히네. 




올해도 칙칙한 내 맘에 봄꽃으로 피어난, 당신은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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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 토



그늘진 차가운 땅에 봄이 내린다.

그대와 함께 걷는 산책길에 꽃비가 내린다.

그리스도의 핏방울이 길바닥에 뿌려진다.

그래서 사순절이 봄에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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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3. <산책길> 게재글



독립운동가로서의 안창호 선생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은 많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조명하는 글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20세기 초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안창호를 보여주는 책을 두 권 발견하고서 반가움에 소개한다. 


먼저 2012년 2월 규장에서 출간된 《안창호 : 사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규장 신앙 위인 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도산의 삶을 동화식으로 엮은 전기이다.  


다음으로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에서 작년 말《겨레의 스승 안창호》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과 일화를 한글과 영어로 한 권에 묶어 내놓았다. '한국기독교지도자 작품선집' 시리즈의 열두 번 째인 이 책은 기존에 전해지는 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 중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글들을 추려 담고 있다. 그 중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도산은 1936년 10월 4일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이 민중의 선각자가 되어서, 먼저 실천적 사랑의 생활을 하므로 모든 방면에 나아가고, 또한 새로워져서 이 강산에 천국을 세우도록 용진해 나아갑시다." (22쪽)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지도자 안창호와 기독교인 안창호를 칼로 자르듯이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 또는 신앙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글을 읽을 것으로 기대하고 이 책을 본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오히려 도산에게서 신앙과 실천(삶)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였다. 이 책의 5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담겨있다. 안창호가 평양에 있을 때에 그와 함께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선교사 마포삼열 (Samuel A. Moffett) 목사가 그에게 교회 일을 함께 할 것을 제의하며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렇게 말하며 그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고 한다. 


"교회 일이라는 것이 혼자 만들어서 하면 안 됩니까? 꼭 목사님과 같이 해야 합니까? 저는 이미 내용과 실천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저의 일인데, 누구한테 무슨 돈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196쪽)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인 실천을 통합한 도산의 성숙한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제2부 동포에게 고함, 제3부 청년과 민족에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오늘날의 한국인들과 청년들에게 고하는 민족의 선각자의 목소리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글본과 영어본이 한 권에 묶여져 나온 것은 해외에 있는 동포들과 한인 2세들에게 도산 안창호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굳이 두 가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국내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1만8천원이라는 책값이 조금 부담스럽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바람연필




안창호

저자
오병학 지음
출판사
규장 | 2012-02-2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도산 안창호라고 하면 누구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훌륭한 애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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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저자
안창호 지음
출판사
KIATS | 2012-11-19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기독교적 정체성은 물론, 사회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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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블로그  <산책길>(spirituality.co.kr) 에 게재하고 있는 '한 줄 묵상' 글들을 자료보관을 위해 이곳에도 옮겨 놓는다. 그러나 같은 글이 인터넷에서 중복 검색되는 것을 피하는 것을 위해 이곳에서는 한 편만을 공개하고 나머지 글들은 비공개로 해둔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맨 마지막 자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자리에 세우도록 결정한 것은 그들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함으로써 부끄러움을 느껴 [지각하는] 습관을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ch 43, 7. (서울: KIATS, 2011), 88.



베네딕트는 그의 규칙서에서 야간기도(Vigil) 시간에 늦는 수사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져 별도로 지정된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을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부끄러움'을 느껴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마귀가 틈을 탈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인류가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느낀 때는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죄를 짓고 자신들이 벗었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벗은 몸' 때문이 아니라 '벗은 영혼'으로 인해 부끄러워 해야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정작 부끄러워 해야할 것에는 뻔뻔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에는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구형 휴대폰, 낡은 자동차, 값싼 옷이나 가방 등에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낡고 때묻은 '습관'으로 인해 얼굴과 마음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워 해야 하지 않을까?


올 한 해 내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 윤동주 <참회록>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