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열망

설교문 2017. 8. 23. 15:53

요나 2:1-10 / 기도와 열망

2017. 8. 23. 

부산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영성훈련 닫는 예배.


여러분은 요나의 기도를 어떻게 읽으십니까? 저는 언젠가 요나의 기도를 응답 받는 기도의 좋은 예로 소개하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마도 우리 중에는 요나만큼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기도를 통해 다시 살아난 것은 정말 놀라운 영적 체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놀라운 체험이 요나를 본질적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였고, 히브리인이었던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토해지는 우여곡절을 통해서 결국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그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다니려면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 니느웨를 단 하루만에 돌아다니며 성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3:3-4).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그의 메시지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외침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선지자들의 외침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선언만 있고, 회개의 촉구는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바란 것은 니느웨의 멸망이었지, 구원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사실들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장소에 몸만 있고, 마음은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이처럼 영적 체험, 또는 종교적 체험은 그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체험의 강도나 빈도나 기이함이 사람의 본질적인 변화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체험에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요나의 기도를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이 기도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요나의 기도문의 대부분은 자신이 당한 고통의 경험에 대한 묘사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소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 핵심적인 구절은 7절인데, 여기서 요나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참된 신이신 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니느웨에서의 요나의 말과 행동에서도 확인됩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고, 매우 성의 없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에 심판이 선언된 지 사십 일 후에, 자신의 예언과 달리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자, 요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니느웨가 망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매우 화를 내며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요나서 4장 1-3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라.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이 기도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틀렸고, 내가 맞습니다.”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항변을 읽어보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언급한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직접 계시하신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또한 요나서 2장의 기도문에도, 요나가 갖고 있던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오는 놀라운 영적 체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훌륭한 사역자,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인 4장 10-11절을 함께 받들어 읽읍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영적 체험을 가졌던 요나가 알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크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죄인이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을 요나는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의 주님이신 것을 머리로 알았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마음,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도 아끼시고 사랑하셔서 살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그 열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많은 영성가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주님의 열망을 나의 열망으로 품게 된다고 말합니다. 열망, 또는 갈망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는 ‘desire’입니다. 영어에서 ‘desire’는 그 자체만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desire’는 항상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desire’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desire’가 지향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desire’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입니다. 용어 자체에는 긍정과 부정의 가치판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신 문장에서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그 지향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열망, 갈망과 같이 긍정적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욕망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도 ‘desire’이고, 성적 쾌락이나 육체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도 ‘desire’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갈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갈망이나 욕구가 없는 상태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꿈틀거리는 갈망, 곧 desire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desire’가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우리 안의 가장 근원적인 desire는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헨리 나우웬은 ‘기도란 우리 내면의 desire를 뿌리 뽑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르게 잡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기도를 통해서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다시 요나의 기도를 생각해보면, 요나의 기도에서 그의 자기중심적인 desire가 자기초월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desire로 바뀌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자신과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욕구는 원수의 도시, 니느웨의 파멸을 바라는 욕구로 나타나는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요나의 desire는 스올과 같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의 간절한 기도 이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갔지만, 그의 욕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곧,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도는 환경의 변화는 가져왔지만, 내면의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깊은 기도가 무엇인지, 또는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환경의 변화라기보다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자신의 내면의 변화보다 환경의 변화, 또는 다른 사람의 변화를 구하는 기도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가 전적으로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한하고 영약한 인간의 자연적인 청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가장 먼저,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desire가 자기초월적이고, 하나님을 향하는 desire로 바뀌기를 회복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요한 깔뱅(John Calvin)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이 종교개혁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원래 깔뱅의 desire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서기보다는 외진 곳에서 조용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한 구석에서 은거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가고자 한 곳은 스트라스부르크(Strasburg)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곳으로 바로 가는 길이 막혀, 깔뱅은 스위스 제네바를 통해 경유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깔뱅이 그곳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개혁자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이 깔뱅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제네바를 개혁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강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깔뱅은 그것은 자신의 기질이나 desire와 맞지 않고, 자신은 독일에 가서 은거할 계획이라고 말하며 거절하였지요. 그러나 파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권을 넘어서, 만약 깔뱅이 제네바를 개혁하는 중요한 일을 거절하고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은거하며 평온히 공부하고자 하는 깔뱅의 계획과 삶을 저주하시길 바란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 말에 깔뱅은 굉장한 충격을 받고 제네바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네바 내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의 반대와 핍박은 매우 거셌습니다. 그로 인해 얼마 후 깔뱅은 제네바를 떠나 자신이 원하던 은둔의 삶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르틴 부처(Martin Butcher)가 깔뱅을 붙잡았습니다. 부처는 특히 제네바를 떠나려는 깔뱅을 다시스로 향하는 요나 선지자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에 깔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개혁을 이끌게 되었지요. 하지만 『시편 주석』 서문의 말미에 보면, 깔뱅은 비록 자신이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혁을 하게 되었지만, 자신에게는 교회의 교화(edification)가 가장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그러한 desire를 자기 마음에 심어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교회를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desire를 깔뱅이 자신의 desire로 삼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요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었고, 누구도 갖지 못한 크고 놀라운 영적 체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깔뱅과 달리 니느웨의 생명들을 귀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 자신의 열망을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께서 신대원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면, 어느 정도의 신학적 지식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신대원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번 영성훈련을 통해서도 크고 작은 영적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열망을 알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열망을 주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왜곡해서 추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심으신 그 열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어 자라고 있습니까? 복음서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들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의 유혹과 염려와 시련 등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거룩한 열망의 뿌리가 말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는 사흘 밤낮을 물고기의 뱃속에서 기도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사흘 밤낮을 이곳에서 기도하시다가 이제 다시 세상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요나는 기도를 통해서 환경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지만, 자신의 내면이 바뀌는 본질적인 변화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곳에서 기도의 방법도 배우시고, 새로운 경험도 하셨는데, 여러분의 내면은 그대로입니까, 아니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까? 여러분의 desire는 여전히 자신의 만족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한 영혼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desire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해도 신대원을 졸업하고 교문을 나서며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 부족해도, 체험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desire를 내 것으로 품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삯꾼 목자, 또는 샐러리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잠시 각자에게 주신 말씀을 가지고, 침묵하며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