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유독 이 책을 좋아했다. 지금은 이것보다 좀 더 글자가 많은 책을 읽지만 한 동안은 거의 매일 밤마다 이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어느날 곰곰이 아빠가 곰곰이에게 선물을 사 주었는데, 그 안에는 맛있는 왕사탕이 다섯 개 들어 있었다. 기분이 좋은 곰곰이는 사탕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가와 사탕을 나누어 달라고 하자 마음씨 좋은 곰곰이는 친구들이 달라는 대로 한두 개씩 나눠 주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곰곰이는 사탕이 하나도 남지 않아서 시무룩해졌다. 그걸 보고 처음에 두 개를 얻었던 꿀복이가 다시 하나를 곰곰이에게 주어서 모두 사탕을 입에 하나씩 물고 즐거워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주지는 않는데, 이 책의 내용이 종종 생각난다. 얼마 전 예배 시간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모두 드리겠습니다."는 익숙한 내용의 찬양을 부르는데, 문득 익숙하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이십 대에 이런 가사의 찬양을 부를 때에는 정말 주님께 내 삶을, 내 생명을 온전히 드려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데 오십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실제로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생명이 이제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와 살짝 당황스러웠다. 반 이상 비어 버린 곰곰이의 사탕봉지처럼.

유한한 이 땅에서의 생명은 시간이며, 시간은 생명이다. 나의 수한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 끝나면 이 땅에서의 나의 생명도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사탕 봉지 속에 시간이라는 알사탕이 몇 개나 담겨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 삶은 그 사탕을 나눠주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교인들에게, 또 내게 시간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탕을 나눠 주듯이 시간을 나눠 준다. 목회는 성도들에게 내 시간을, 내 생명을 나눠주는 것이고, 강의나 글쓰기나 영성지도나,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내가 나눠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손을 내미는데, 거절을 잘 못해서 가능한 작은 사탕 하나씩이라도 나누려고 노력하다 보니, 늘 바쁘고 일이 많다. 게다가 뭘 하든지 속도가 느려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제 사탕봉지가 반 이상 비어 버렸으니, 남은 사탕이 몇 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루하루 낭비 없이, 인색함도 없이 나눠야 할 곳에 제대로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요즘 내가 가진 높은 목표다. 그리고 꿀복이가 다시 준 사탕을 곰곰이가 기쁨으로 받은 것처럼, 나 역시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나누어 주는 고마운 이들의 생명을 당연함이나 부담스러움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겸손하게 받아야겠다. 원래 사탕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니까. 그래야 더 달콤하고, 즐거움이 넘치니까.


댓글을 남겨 주세요

코로나19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길찾기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큰 위기 가운데 있지 않은가?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해 혼란 가운데 있는 교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동숭교회 주최로 몇몇 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포스트코로나, 교회의 새로운 길을 찾다>라는 강연 시리즈를 준비하였다. 어설프고 부족한 나도 부름을 받고 영성 분야 강의를 맡아 참여하게 되었다. 긴급하게 모였지만, 강연자들은 약 두 달 동안 여러 차례 온오프라인으로 모여서 생각과 마음을 나누며 충실히 준비하였다. 그런데 막상 행사 당일 코로나19 폭증의 여파로 인해 아쉽게도 현장 강연이 취소되고, 이후 녹화된 강연이 온라인에 게시되는 것으로 갈무리되었다.

 

원래 강연자들에게 주어진 가이드 라인은 어려운 교회들이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내용'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영성에 대해서 실제적인 이야기만 하다 보면, 영성을 단지 유용한 '상품'이나 '프로그램'으로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높다고 생각해서, 나는 강연에서 본질과 실제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주어진 강연시간이 단 12분에 불과하여 여러 가지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담다 보니 강연자나 청중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죽'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쨌든 강연 자료집에는 조금 더 내용을 담을 수 있어서 강연 원고보다 조금 더 긴 글을 실었는데, 혹시나 참조가 되실 분이 있을까하여 여기에도 옮겨 놓는다.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블루와 부재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고 하지요. 오늘날 많은 분들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제목을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로 정해 보았습니다. 


이 질문에는 크게 두 가지의 질문이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살아있는 사람들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들 방치하시는가라는 의문이지요. 이것은 ‘신정론(theodicy)’에 대한 문제인데, 이 짧은 강연에서 자세히 말씀 드리기가 어려워 강연 말미에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주요한 장은 바로 집회입니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함께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은혜를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열리는 사경회, 부흥회, 수련회 등의 집회를 통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집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일예배도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지요.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해 우울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으로 어둡고 메마른 시대입니다. 정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에서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랜 영적 훈련을 오늘날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에 현대 IT기술을 활용하여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열왕기상 18장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일종의 집회가 열린 것이지요. 이 집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왕상 18:24, 37-39). 곧, 눈에 명백하게 보이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회 후에 이세벨이 격노하여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왕상 19:2)고 엘리야를 협박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이세벨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낙심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버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렙산에서는 갈멜산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갈멜에서 하나님은 기적으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호렙에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방법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침묵 가운데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글개역개정 성경에서 “세미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부드러운 고요(정적)의 소리”(דְּמָמָ֥ה דַקָּֽה ק֖וֹ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영어성경(NRSV)에서는 이 부분을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왕상 19:12).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원래 정적, 고요, 침묵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순전한 침묵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입니다.

 

 

장애물을 넘어서서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역사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대중 집회가 어려운 이때에, 홀로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지요.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독교 유산이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로 변해 가면서 갈수록 더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 있는 사람, 2018), 151.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 비록 유진 피터슨은 북미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삶.” 이것은 새로운 삶의 형태, 또는 새로운 영성훈련 방법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삶이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할 일이 많은 공생애 중에도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삶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고독과 침묵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이라고 하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1)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한 상태, 그리고 (2)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olitude’(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를 구분합니다. 먼저 solitude는 혼자 있는 상태인데,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loneliness’는 홀로 있어 친구나 말을 나눌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행감을 의미합니다. 흔히 영성생활에서 강조되는 고독은 loneliness, 곧 외로움이 아니라 solitude를 말합니다. 

 


참된 고독과 침묵이란


그렇다면 영성훈련으로서의 고독과 침묵은 무엇일까요?


1. 먼저 고독은 대중 속으로의 도피를 중지하고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존재합니다. 죄나 상처, 두려움이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 등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잊기 위해 대중 속으로 도피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즐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하지요. 그래서 고독은 그러한 도피를 중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말입니다.

 

2. 또한 고독은 부적절한 집착으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갈망하는 존재들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많은 활동들로 채웁니다.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성취감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만족감을 위해 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고, 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갈망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독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물질, 쾌락 등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영혼의 고향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침묵은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가르치셨지요. 어떤 분들은 유창한 말로 기도하는 것, 또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는 방언이 하나님의 신비에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많은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언어로 기도할 때에 그 언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납니다. 


4. 나아가 침묵은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장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요. 언어는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침묵은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공간입니다. 


5. 이런 점에서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는 성소입니다. 

 


고독, 공동체, 사역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된 고독은 인격체(person)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격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적 자아, 곧 ‘참 자아’(true self)를 말합니다. 참된 고독은 고립과 반대입니다. 고독 속에서 깨어난 참 자아들은 공동체(community)를 이룹니다. 헨리 나우웬(Henry J.M. Nouwen: 1932-1996)도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며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단(collectivity)입니다. 머튼에 의하면 집단은 개인들(individuals), 곧 거짓 자아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 채, 오직 집단에 순응하여, 집단의 목소리를 냅니다. 거짓 고독은 이러한 개인들의 도피처입니다. 그저 사람이 싫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거짓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고독 속에서는 참된 자아가 깨어날 수 없고, 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환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친척입니다. 모일 수 있을 때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모이지 못할 때는 개인으로, 여전히 거짓 자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공동체’와 ‘집단’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공동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일수록 ‘집단’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인격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개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한 ‘개인’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이타심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섬깁니다. 그리고 그 사역이 마친 후에는 다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고독의 자리로 물러갑니다. 마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이 이어져서, 온전한 영성생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그래서 이제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독과 침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지 안내해 드리고자 합니다. 


1.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오늘날은 원하지 않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 비자발적인 고독을 자발적인 고독으로 바꾸어봅시다.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현존 가운데로 나아갑시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에, 주님은 “와서 보라”고 초대하셨습니다(요 1:38-39). 우리가 “주님,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님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이 계신 곳, 고독과 침묵 속으로 매일 나아갑시다. 5분도 좋습니다.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짧은 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시간을 늘려 가십시오. 타이머로 시간을 설정해 두고, 그 시간만큼은 침묵 속에 앉아 계십시오. 


2.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합니다. 참된 고독은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한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주님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 지식을 현실화 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한 주님께 응답하기 위하여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은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그분께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십시오.


3.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읽기, 영적 일기 쓰기, 성찰의 기도 등을 합니다.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해왔습니다. 그 훈련들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영성학자들이 함께 모여서 쓴 책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두란노에서 출간된 《오늘부터 시작하는 영성 훈련》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중에 각자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훈련을 고르십시오. 그러한 활동들도 몇 분간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고독을 함께 나눌 동반자 그룹과 정기적으로 만나십시오.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보호자입니다. 이러한 동반자 그룹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자신의 고독의 경험을 함께 나누십시오.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것이 어려울 때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져도 좋습니다. Zoom, Google Meet, KakaoTalk, Facebook, Skype 등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영상과 음성으로 또는 음성만으로 그룹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5. 고독을 인도하고 안내할 영적 지도자를 찾으십시오. 여행에도 여행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에도 영적 안내자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영성지도자를 찾으십시오. 아마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각자가 속한 교회의 목회자들일 것입니다. 목회자들께서도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에, 그저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스스로 영성에 대한 공부와 훈련에 좀 더 시간과 열심을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만약 주변에서 좋은 영성지도자를 만나기 어렵다면, 온라인을 통해서 좋은 지도자의 강의나 설교를 통해 도움을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다만 온라인에는 좋은 자료와 좋지 않은 자료가 섞여 있으므로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영락수련원retreatcenter.youngnak.net)에서는 코로나19 시대에 개인 또는 소그룹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온라인 렉시오 디비나〉와 〈온라인 영성 수련〉 등의 자료와 기회를 만들어 나누려고 계획하고 있으니 참조하십시오. 


6.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매일의 짧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외에도 한 달에 하루 ‘고독의 날’(a day of solitude)을 가지고, 일 년에 며칠 온전히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연례 리트릿’(an annual retreat of solitude)을 정기적으로 하십시오. 사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지신다면, 영적 여정에 매우 많은 유익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목회자였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는 “목사는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조지 허버트, 《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 제24장. ). 분주한 매일의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멀리서 자신의 교구를 조망하기 위한 거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활동들로 너무 바빠서 자기 성찰의 시간마저 충분히 갖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 교회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위기 속에서 질주하고 있는 원인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마지막으로 강연의 시작 부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질병과 악을 방치하시는가? 침묵하시는가?”라는 신정론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회 포비아(church-phobia)”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은 진리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과 바이러스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들’(christs)이 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개인’(individual)이 죽고 ‘인격체’(person)로 다시 살아날 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성육신’하실 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고후 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고후 2:15).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집단(collectivity)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community)로 거듭날 때 교회가 다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야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라며 탄성을 터트리게 될 것입니다(말 3:12).

 

 

댓글을 남겨 주세요

저는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 여러분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항상 사회의 변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수용이나, 사회적 틀에 의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어딘가에 매이거나 통제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떠다니며 존재하기(a free-floating existance)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부르심(calling)에, 자신들의 소명(vocation)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에 충실하다면,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소통(communication)은 소통이 아니라, 교감(communion)입니다. 그것은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을 넘어서고, 이야기를 넘어서며, 개념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치(unity)를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래된 일치를 발견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원래의 일치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원래의 모습입니다(What we have to be is what we are). 


The Asiana Journal of Thomas Merton


댓글을 남겨 주세요

아침 기도

 


새벽과 아침의 경계가 무너진 시각
암막 커튼 치마폭 아래로
고운 빛가루들이 쏟아져 내린다

가지런히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쓸어 담아
빛 알갱이 고슬고슬한
아침밥을 지어먹자

밥알들이 내 안에서 반딧불 되어
눅눅한 어둠을 구석구석 밝히면
나도 오늘 하루 빛이 되어
배고파 우는 아이들에게
한 그릇의 밥이 되리니

2020. 7. 16.

댓글을 남겨 주세요


비오는 생일

 

 

빗속에서 생일을 맞으며
내가 생명을 빚졌음을 기억한다

핏덩이로 세상에 나와 탯줄이 끊긴 뒤
내 어머니와 나의 아내와
수많은 사람들이 해준 밥을 먹고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 밥을 위해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마트에서 땀을 흘렸고
졸음과 싸우며 도로 위를 달렸으며
밭과 들에서 거친 땅을 팠고
바다 위에서 무서운 파도와 싸웠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하늘에서 햇빛과 비를 내려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게 하였다

아직 어두운 새벽, 빗속에 생일을 맞으며
평생 값을 수 없는 엄청난 빚 속에
밥알별들로 이루어진 은하수의 빛 속에 있어
새삼 부끄러워하며 슬며시 운다

2020.



댓글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