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 “성령님은 누구시며, 내게 어떻게 나타나시나요?”

 

Answer : 일반적으로 우리 안에 궁금증이 생기는 이유는 머릿속에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 이전에 그 질문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 되는 욕구가 그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가게의 쇼윈도우에서 마네킹에게 입혀진 어떤 옷을 보았는데, 그 상품이 얼마인지 궁금해진다면, 그것은 곧 그 옷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그 마음에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비슷하게 질문자께서 성령님에 대한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신 이유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을 알고, 보고, 만나고 싶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는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본성적인 그리움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인해 하나님 지식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을 음식이나 옷 등과 같이 창조된 다른 것들을 즐기거나 소유함으로써 채우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만족과 기쁨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 이외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신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마28:19). 성령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으며(창1:2), 구약시대 때도 예언자들에게 임하셔서 활동하셨고(대하15:1), 신약시대 때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마1:18, 3:16, 4:1, 12:28).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셔서 믿는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요14:16-17).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고전3:16),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셔서(롬5:5),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구주가 되심을 깨닫고, 믿고, 시인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12:3). 또한, 성령님은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며(고전6:11),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며(롬8:26),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엡3:16).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며(갈5:22-23),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행1:8), 그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롬15:19). 공동체적으로도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지만(고전12:11),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엡4:3).

 

이러한 성령님은 사람들의 눈에 ‘바람’같이 나타나시기도 하고(행2:2), ‘불’같이 임하시기도 하며(행2:3), ‘물’과 같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시기도 합니다(요7:37-39).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는 하늘에서부터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막1:10). 여기서 성령에 대한 묘사가 모두 ‘같이’라는 조사를 사용한 비유로 되어 있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형상이 없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나타나심은 비유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물이나 불처럼 상반된 이미지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성령님은 어떤 특정한 개념이나 이미지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현요한 교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바람’, ‘불’, ‘물’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불이나 바람처럼 매우 강렬하게 경험되기도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롬14:17).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알고 만나고자 할 때 성령님을 자신의 지식이나 선입관이라는 안경을 쓰고 볼 것이 아니라 맨 눈으로, 곧 제한되지 않은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즉 하나님의 숨이신 성령을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2:7). 그러므로 성령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감각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훈련을 통해서 계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 훈련(spiritual discipline)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가장 먼저 회개를 통해서 죄를 벗어 버리고, 또한 예배와 성경공부와 독서를 통해서 무지를 벗어 버리며, 나아가 말씀 묵상과 기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훈련하시기를 권합니다.

 

「남문밖 기쁜소식」 309 (2019년 7-8월), 40-43쪽 게재글

 

수련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부터 시작해서 각종 수련회가 이 여름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 수련회에 참석하고, 또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에 힘입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갈 것이다. 은혜, 은혜, 은혜, 이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이다. 아마도 ‘은혜’라는 말은 굳이 수련회라는 환경이 아니더라도 ‘십자가’나 ‘구원’과 같은 단어와 더불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다음으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적으로 은혜(χάρις)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을 의미한다. 영어사전 《메리암-웹스터》(Merriam-Webster)에서는 은혜(grace)를 “인간의 갱생(regeneration)과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도움”이라고 정의한다. 넓은 의미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은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매우 고귀한 선물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성경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알려 준다(출20:6, 시86:15, 사30:18).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특별한 선물을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선물’이란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받는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선물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선물을 당연히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보상’이다. 선물은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주는 사람의 호의나 자비로 인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캐럴송에서 “울면 안 되, 울면 안 되,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라고 노래하는 것은 선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원래 마음씨 좋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착한 아이들이나 나쁜 아이들이나 차별 없이 모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어떤 특별한 공로가 없는 무익한 존재인 나, 심지어 때때로 죄를 짓고 그 속에서 뒹굴기까지 하는 악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고,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선물을 주신다는 역설적인 진리다(마5:45, 롬5:8). 곧, 나는 그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모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약1:17). 다시 말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매일 아침 창을 넘어와 우리를 깨우는 아침 햇살, 한낮의 나무그늘과 시원한 산들바람, 고단한 마음과 육체를 쉬게 하는 밤, 매 끼니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선물의 절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과 마찬가지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선물로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이러한 진리의 발견, 곧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수반한다. 선물을 받게 되면,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쁨과 감사와 경이로 벅차오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슬픔과 혼란 속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길에서 만난 주님이 성경을 풀어 주시는 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되자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체험하였다(눅24:32).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뒤따라오는 것이 감정적 반응인데,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는 것보다 그 선물에 따라오는 감정적인 느낌을 더 추구한다. 그래서 찬양을 빠른 비트에 맞추어 열광적으로 부르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은혜를 받은 느낌’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빠른 찬양과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 의하면 정서(affection)가 하나님의 은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감정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게 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당연히 일어나지만, 깨달음 없이 감정적 뜨거움이나 만족만을 추구하다보면, 쉽게 김이 빠지는 공허한 열광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내면의 변화 없이 ‘종교적 신경안정제’나 ‘종교적 마약’을 흡입하는 것과 같아서 감정이 식은 뒤에는 더욱 강렬한 감정적 자극이 아니면 만족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닫게 될까? 이에 대해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을 여러 가지 소개할 수도 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성경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불린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다. 복음서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가 이렇게 인사하였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 이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른 가장 본질적 이유는 바로 주께서 그녀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은혜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무리 중의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눅11:27-28). 그러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서 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마리아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심의 결과였다. 그녀는 가브리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녀인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순종할 수 있었다. 즉,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자였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핵심적인 영성훈련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슬픔과 절망으로 눈이 가리워서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에게 깨달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붙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났고, 그래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도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를 보아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사경회(査經會)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날 때 일어났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남한산성의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영성훈련 프로그램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말씀묵상수련인데, 이것은 영성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에서 말씀과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봉사자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힘을 쏟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칠 때에는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에 지식을 습득을 위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개방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말씀이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마리아처럼 단순히 순종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 여름에 무엇보다 말씀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자. 수련회는 물론 휴가를 떠날 때도 말씀을 손에 들고 가자. 참된 쉼과 회복은 말씀과 만나고, 그 안에 거할 때 일어날 것이다.

 

「남문밖 기쁜소식」 309 (2019년 7-8월), 10-13쪽 게재글

마카리우스(Macarius of Egypt)는 4C의 사막 교부다. 이 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사막에서의 고독과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어 자신과 하나님과 형제 자매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지게 한다는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충분할 듯하다. 혹시 인용하실 분은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마카리우스와 조랑말

 

 

사막의 언저리에 위치한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의 생각에는) 그녀는

마법에 걸려

조랑말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먼저 그녀를 질책했다.

“왜 너는 이렇게 말로 변해야 했느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에게 고삐를 채워

뜨거운 황무지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는 마카리우스라 불리는

성인이 수도실에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 그들은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젊은 암말은

저희의 딸입니다, 또는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사악한 사람들이,

마법사들이, 이 아이를

지금 당신이 보시는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기도해 주셔서

이 아이를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바꾸어 주십시오.”

 

“저의 기도는” 마카리우스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눈에는 암말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들은 이 착한 아이를

짐승이라 부릅니까?

 

그러나 그는 그녀를 부모들과 함께

자신의 수도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그 소녀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가 어떠한 사랑으로 그의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는지를 그들이 보았을 때에

그들은 즉시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결코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바뀐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녀였다.

 

“그대들의 원수들은

(마카리우스가 말했다)

여러분 자신의 눈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비뚤어진 생각이

(은자는 말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을

새나 짐승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여러분 자신의 나쁜 의도가

(맑은 눈을 가진 이가 말했다)

세상을 유령들로 가득 채웁니다.”

 

 

토머스 머튼 지음, 권혁일 옮김

『분노의 계절의 상징들』에서

 


Macarius and the Pony

 

 

People in a village

At the desert's edge

Had a daughter

Who was changed (they thought)

By magic arts

Into a pony.

 

At first they berated her

“Why do you have to be a horse?”

She could think of no reply.

 

So they led her out with a halter

Into the hot waste land

Where there was a saint

Called Macarius

Living in a cell.

 

“Father” they said

“This young mare here

Is, or was, our daughter.

Enemies, wicked men,

Magicians, have made her

The animal you see.

Now by your prayers to God

Change her back

Into the girl she used to be.”

 

“My prayers” said Macarius,

“Will change nothing,

For I see no mare.

Why do you call this good child

An animal?”

 

But he led her into his cell

With her parents:

There he spoke to God

Anointing the girl with oil;

And when they saw with what love

He placed his hand upon her head

They realized, at once.

She was no animal.

She had never changed.

She had been a girl from the beginning.

 

“Your own eyes

(said Macarius)

Are your enemies.

Your own crooked thoughts

(said the anchorite)

Change people around you

Into birds and animals.

Your own ill-will

(said the clear-eyed one)

Peoples the world with specters.”

 

By Thomas Merton(1915-1968)

from Emblems of a Season of Fury

New Directions, 1963.

 

Macarius of Egypt (300-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