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숲


나무들이 아가씨처럼 사뿐사뿐 
       춤추듯 걸어다니고
나무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 곳
 
나무들이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노래하고
나무들이 졸졸 흐르는 
       침묵 속에 발담그고 기도하며
나무들이 두 팔 걷어 부치고
       먼지를 털어내는


남한산성 작은 숲 
       작은 새들의 피난처
 
2019. 5. 28.
영락수련원 봉사자수련

 

 

 

영락교회 「만남」 545호(2019년 6월)에 게재한 글을 옮겨놓는다. '영성과 성령'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영성에 있어서 성령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설명하려고 했으나, 의도와 달리 너무 이론적이어서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 되고 말았다.


 

영성은 하나님 체험,

사랑의 체험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곧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비슷하게 오늘날 한국에서 ‘영성(靈性)’이라는 말도 상황이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영성을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 영(靈)’과 ‘성품 성(性)’ 두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영성은 지성(知性)이나 감성(感性)과 더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기능(faculty)의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성을 ‘사상’이나 ‘정신’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의 영성’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실제로는 그 내용은 마르틴 루터의 사상, 신념 등에 관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성학의 분야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이현령비현령 같은 용어가 아니라 특정한 개념을 가진 단어입니다. 물론, 학자들마다 ‘영성’을 정의하는 표현은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영어로 “lived experience of reality”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로는 ‘실재(實在)에 대한 생생한 체험’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으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생생한 체험(lived experience)’이란 독일어 ‘Erlebnis [에얼리프니스]’를 번역한 말로서 다이빙 선수가 물속에 풍덩 빠졌다가 나오는 것처럼 짧지만, 그 체험 속에 들어가는 사람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하고 생생한 체험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리얼리티(reality)’, 곧 ‘실재’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객관적 대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산들바람이 불어와 자신의 뺨에 부딪히는 것을 느낀다면, 이때 그가 인식(경험)하는 대상은 산들바람입니다. 또는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때 인식의 대상은 갓난아기지요.

 

그런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존재를 변화시키는 생생한 체험(lived experience)을 일으키는 대상은 일반적인 사물이나 현상이라기보다는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이 궁극적인 실재(the ultimate reality)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 체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현존(presence) 속으로 풍덩 빠지는 것과 같은 강력하고 생생한 체험이 영성학에서 말하는 기독교 영성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영성과 다른 종교 영성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특수한 용어인데, 오늘날에는 일반명사가 되어서 다른 종교에서의 비일상적 체험을 뜻하기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영성’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spirituality [스피리츄앨리티]’는 어원을 추적해보면 라틴어 ‘spiritualitas [스피리투알리타스]’에서 온 말로서,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영(pneuma)’ 또는 ‘영적(pneunatikos)’이라는 표현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영성은 ‘영(spirit)’이 그 핵심에 있습니다.

 

이때 ‘영’은 먼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Holy Spirit)을 지칭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엡1:17 참조). 좀 더 정확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요14:16-17). 그래서 영성은 성령을 빼면 이른바 “앙꼬[팥소] 없는 찐빵”이 되고 맙니다.

 

또한 영성에서의 ‘영’은 인간의 ‘영’과도 관련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으로서의 인간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했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만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게 되지요.

 

요약하면, 영성, 곧 하나님 체험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인식할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나 자신의 외부에 있는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성령 안에 있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말씀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는 물론이고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바라보고 느낄 때, 그리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이와 같은 신비한 하나님 체험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하나님 체험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0-12).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서 수평적으로 동료 인간들과 서로 사랑하면, 수직적으로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긴 요한 사도도 그의 편지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식하고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고 말합니다(요일3:24).

 

이런 점에서 영성 생활(spiritual life)이란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 또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삶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삶이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정수(精髓)입니다.

 

 제72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회 | 연세대학교, 서울, 2019년 5월 18일.


유은호의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 연구”에 대한 논찬

 

 

유은호 박사의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 연구”는 저자가 각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론 연구”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글이다. 그래서 이 발표문에서 논증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고 비평하기 위해서는 유은호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론’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살펴보아야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논찬자의 한계로 인해 발표문만을 읽고 글을 쓰게 되어 이 논찬 역시 한계가 있는 글임을 먼저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 AD 345-399)는 “관상(적) 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수도생활의 정수로 만들고 수도원주의와 신비주의의 힘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사막 교부다. 유은호 박사는 발표문에서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론에서 ‘아파테이아’가 어떠한 개념과 역할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아파테이아’의 개념을 전승사적으로 고찰하고, 다음으로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 개념을 그가 영향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이들의 개념과 비교하여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에바그리우스는 스토아학파에서 아파테이아 개념을 빌려 오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아파테이아 개념에서는 금욕적 차원에서 수용하며,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에서는 일자와의 합일에서 사용한 구조를 빌려 와서 자신의 기도론 구조에 맞게 두 단계 아파테이아로, 조명의 기능으로 변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은호 박사의 연구는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에서 매우 드물게 언급되는 인물인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와 그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조명하고 있기에 실천적인 측면에서 유익한 글이다. 영혼이 욕망이나 정념으로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는 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하는 청원들로 가득한 기도를 드리는 한국 교회의 기도자들에게 기도의 성숙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또한 아파테이아를 불완전한 단계와 완전한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은 침묵기도 또는 관상적 기도를 훈련하면서도 방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관상(theōria)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길을 안내해 준다.

 

이런 점에서 유은호 박사가 발표를 마무리하며 “최근에 개신교회도 관상 기도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에바그리우스가 이미 전통에서 빌려온 용어를 의미를 달리해서 사용했듯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계승된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의 개념을 개신교 각 교파의 전통에 맞는 적절한 용어와 의미로 재해석하여 사용하는 일은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오늘날 한국의 영성학자들에 주어진 과제 중의 하나는 기도에 대한 서구의 이론과 체험을 소개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의 기도 방법과 체험의 특수성을 반영한 토착화된 기도신학을 세워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유은호 박사의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 연구”는 에바그리우스가 프락티코스(Praktikos), 곧 관상에 이르는 실천적인 학문을 추구한 것처럼 실천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가져와서 엮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발표자의 논문이 학문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하는지는 불확실하다. 발표문의 중심을 이루는 ‘II.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 개념의 전승사적 고찰’과 ‘III.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의 대부분은 1차 자료에 대한 분석보다는 2차 자료를 간접인용하거나 표현만 바꾸어 재서술(paraphrase)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서구 철학과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서의 ‘아파테이아’의 개념에 대한 발표자의 독창적인 견해나 발견보다는 대부분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이나 준 수주키(Jun Suzuki)와 같은 학자들의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엮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를 조명(illumination)의 단계와 상응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유은호 박사의 독창적인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발표자는 “에바그리우스의 완전한 아페테이아는 마지막 단계인 순수기도로 가기 위한 조명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영혼의 영적 생활 또는 발전을 정화, 조명, 일치의 세 가지 길, 또는 국면으로 설명하는 것은 위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Pseudo-Areopagite; 5C-6C)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조명의 단계(the illuminative way)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정욕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대죄(mortal)에는 쉽게 빠지지 않지만, 소죄(venial sin)는 쉽게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이 땅의 것들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공상들로 마음이 산만해지고, 수많은 욕구들로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발표자는 앤드루 라우스(Andrew Louth)를 인용하며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얻은 영혼은 “평온의 상태, 곧 영혼이 더는 정념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조명의 단계와 에바그리우스의 불완전한 아파테이아의 상태가 동일하거나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에바그리우스보다 후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영적 발전의 구조로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 논찬의 처음에서 밝힌 것처럼 논찬자가 유은호 박사의 학위논문 또는 그 논문을 출판한 책을 전체 읽어보지 못하여 본 논찬은 매우 협소한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다. 또한 논찬자의 에바그리우스에 대해서 가진 지식이 일천하여 논찬자의 비평 또한 무지의 소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은호 박사의 열심 어린 노력과 깊은 기도로 저술된 논문을 읽고 논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드린다. 또한 유은호 박사께서 앞으로 학문과 실천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길 기도하며, 이쯤에서 어리석을 말을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