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5:3
제목 : 마음이 가난한 사람
주후 2013년 8월 4일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또는 “잘 될 거예요!”라는 말,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말씀하시거나 들어보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 건강이 좋지 않은 이들, 또는 중요한 일이나 시험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잘 될 거니까, 걱정마세요!”라고 종종 위로하고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막연히 ‘잘 될 거야’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앓고 있는 분들,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조금의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커다란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는 해 드릴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막연하게 “잘 될 거니까,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진정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깊은 위로를 전해줄 수 있을까요?
It will be well with those...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팔복’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여덟 가지의 복이 있는 사람을 나열하는 팔복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말로 이러이러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된 원어는 다르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어가 아니라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생활 언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하셨다고 하지요. 어떤 학자는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어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아람어와 비교 연구한 뒤에, 이 구절은 “복이 있나니”가 아니라 “잘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합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오늘 본문 3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한글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많은 영어 성경들에서는 “Blessed are those who are poor in spirit”이라고 되어있지요. 그런데 그 학자에 의하면 이 번역보다는 “It will be well with those who are poor in spirit.” 곧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잘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 아람어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3절을 우리말로 새롭게 옮겨보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잘 될 것이다. 곧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잘 될 것인데, 구체적으로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잘 될 거야.”라는 말을 예수님께서도 하셨다 사실이 말입니다. 더욱더 예수님께서는 막연하게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사람들은 이러이러하게 잘 될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여덟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씩 사람들이 “아무개는 뭘 해도 잘 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부러워하는 것을 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 “모든 일이 다 형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그와 같이 복 있는 사람, 잘 되는 사람, 형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받는 보상이 무엇인지를 여덟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3절은 그중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 보겠습니다. 제가 누가복음 6장 20절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러분 혹시 마태복음 5장 3절과 방금 들으신 누가복음 6장 20절의 차이를 눈치 채셨습니까? 가장 큰 차이는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누가복음의 표현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도 포함합니다. 아니 물질적인 가난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듯합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를 바라고 주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억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물질적인 가난과 마음의 가난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지면, 마음도 정말 가난해집니다. 아마 가난을 경험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돈이 없어서 집세나, 공과금, 카드 값, 할부금을 납부하지 못할 때,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곤경에 빠진 친척이나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을 때,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자신이나 가족이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할 때, 싸구려 버거로 한 끼를 때우거나 그것도 사먹을 돈이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해지는지요? 이럴 때 경험하는 마음의 가난은 바로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없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인식이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합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심령의 가난’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가난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존재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메시지》라는 성경에서는, 마태복음 5장 3절의 앞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곤란에 빠졌을 때에, 너희는 복되다. 그곳에 너희가 적을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이 많아질 것이다. (You’re blessed when you’re at the end of your rope.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곤란에 빠졌을 때에 오히려 복되다는 말씀이 잘 받아들여지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바로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때가 바로 복된 때입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속수무책束手無策, 곧 스스로의 능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주님만 간절히 바라보고 의지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높으심을 고백하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높은 마음, 스스로 부유한 마음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마음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품었던 마음,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과 불순종과 반대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마음은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이며, 나의 무능력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순종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가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가져야할 본질적인 마음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 예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이 없는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가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실질적인 가난한 삶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여러분은 이런 가난한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와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는 동안 숱하게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 오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도저히 헤쳐 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대부분은 가난한 마음을 최소한 한두 번 정도는 경험해 보시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가난한 마음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겸손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매달리다가도, 그 일이 잘 해결되고 편안해지면, 다시 마음이 부요해지기 쉽습니다.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화장실 갈 때의 마음과 화장실에서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이지요.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창고에 넣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거둬들이자, 창고를 더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재산을 쌓아 두고 먹고 마시며 지내야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오늘밤이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데려가실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눅12:21)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신에 대하여는 부유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한 사람은 아닙니까? 자신이 가진 소유물, 집, 자동차, 예금, 보석, 또는 재능, 실력, 건강 등을 더 의지하고, 그것에 대한 만족감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은 덜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성경에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특히 그가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에, 그리고 왕이 된 후 여러 가지 위기를 맞았을 때에 다윗은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수많은 그의 기도들이 다윗이 가졌던 가난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을 함께 찾아봅시다. 시편 70편 5절입니다. (구약 853쪽.) 제가 받들어 읽겠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여러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고 궁핍한지, 그래서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지 느껴지십니까? 이 구절을 외워서 틈이 날 때마다 이 구절로 기도한다면 우리가 지속해서 가난의 마음을 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구절, 특히 시편 구절을 틈이 날 때마다 반복하는 기도를 일명 ‘화살기도’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우리가 반복해서 외울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한 존재임을 다시 기억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임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극심한 가난과 고통,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루에도 수십 번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린다면 신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은 이렇게 짧은 기도를 반복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 시편 70편 5절을 다시 함께 읽어봅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우리 주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주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한나는 하나님께서 아들 사무엘을 주신 후에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 (사무엘상 2:8)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진흙 가운데에서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다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3절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잘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표현으로 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잘 아시는 대로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혹시 실망하신 분이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품는 자가 잘 된다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란 것이 ‘고작’ 천국에 가는 것이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또는 그 ‘천국’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매력과 도전, 흥분을 느끼시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 믿고 ‘당연히’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천국(천당)에 간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기 때문에 천국은 당연히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당장 죽음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천국이 얼마나 귀하고 매력 있는 복인지를 잘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더더욱 마태복음 5장 3절에 기록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읽으며, “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겠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주 적은 듯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 중의 한 분이라면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과 ‘가난한 마음을 품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의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 가난한 마음은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도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한 번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셨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계속해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내가 과거에 한 번 예수를 구주로 믿은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내가 지금도 계속해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서 가난한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우리 고백의 진정성도 줄어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드렸던 질문, ‘여러분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이제는 한 가지 질문을 더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얼마나 진정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혹시 입술과 머리로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부요함, 곧 스스로의 재물과 능력, 건강 등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어떠한 매력이나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새로운 메시야,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특별히 성경에 ‘열심당’이라고 묘사된 사람들은 무력 투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오려고 애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길은 무력 투쟁을 통한 혁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로 기대하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무력 혁명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나라, 곧 정치 체제로서의 새로운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곧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나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고 하셨지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앞서 누가복음 6장에도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과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의 천국은 미래에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여 가게 될 곳이기도 하지만, 현재에 우리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복은 바로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잘 될 것이라는 말씀은 곧 그가 고통과 절망,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 그것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우리가, 죽어서 부활하여 다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이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다스리심 속에서 살 수 있으니 그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쩌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충격과 실망을 받으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해서 누리는 복이 고작 하나님 나라라니!’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합니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맛이나, 가보지 못한 장소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삶의 비결이 바로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가난한 주님의 삶과 마음을 본받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설교를 처음 시작하며 말씀 드린, ‘잘 된다는 것’ 또는 ‘잘 되는 삶’이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것이라는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문제, 사업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문제, 병이 낫고 악화되는 문제,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넘어섭니다.
사실 오늘 이 설교는 원래 지난 4월 어느 교회 수요일예배에서 설교하기 위해서 쓴 원고입니다. 그때 저는 설교 원고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어제 한국에 있는 제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종합검진을 받으셨는데 폐암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 저의 마음도 상당히 가난해졌습니다. 아마 제 아버지의 마음도 매우 가난해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버지의 병이 치료가 되어서 생명이 연장되든지, 그러하지 못하든지 간에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 볼 때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 이어진 정밀 검사 결과 폐암1기로, 수술 후 일주일이면 퇴원 가능하고, 5년 이상 생존 확률이 70-80%에 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담당의사의 확신에 찬 장담과는 달리 아버지는 수술 휴유증과 각종 합병증으로 3주간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기계에 의존해서 겨우 숨을 쉬시고 있는 그 때에도, 짧은 면회시간에 만날 때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친께선 결국 수술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지난 5월 12일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석 달이 지난 지금, 저는 지난 4월에 작성했던 설교문을 다시 고쳐 쓰며 아버지께 무엇이 잘 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잘 되었다고 전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수술 전 담당 의사가 수술에 따르는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서, 위험한 수술이 아닌 다른 치료 방법을 택했더라면 저희 부친께서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잘 될 것이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 다시 생각하면, 수술 전과 수술 후 중환자실 침대에서 극도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셨을 저의 아버지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 아버지께서 가족들의 면회가 제한된 중환자실에서 극도의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 계셨을 것도 분명하나, 또한 주님께서 그때 그 분을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분의 깊은 고통과 외로움에 함께 하셨을 것도 분명합니다. 중환자실에 계신 동안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실 때도 많았고, 기관지 절개로 말씀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식이 없는 사람도 만나주실 수 있으며, 말을 할 수 없는 이의 영혼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잘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침상에 계시던 그 3주 동안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누리셨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아버지께 그리고 주님께 물어 보려고 합니다.
중세의 신비가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 1342-ca. 1416)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약 서른 살이 되었을 때(1373년 5월)에 그녀는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열여섯 번의 계시를 받은 뒤에 그녀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후 그녀가 자신이 받은 계시를 기록한 책에서 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수난은 [죄로 인한 인류와 창조세계의] 고통에 맞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위로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한 그분의 복된 뜻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선뜻 그리고 달콤하게 위로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일들이 잘 될 것이란다.”
- 노리치의 줄리안,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Short Text Ch.13.
무엇보다 가난한 마음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기를 간구합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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