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밤을 걸어간 맨발의 수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형성-


흔히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른다. 이 어둠을 지나 16세기에 종교개혁의 여명이 밝아 왔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 1542~1591)은 이 여명기에 어둔 밤을 걸어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밝은 빛을 향해 가는 길을 맨발로 걸어간 신비가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선두 주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존 칼빈(John Calvin, 1507~1564)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았음은 물론이고, 가톨릭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의 선두주자였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와 동시대에 같은 스페인 땅을 밟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빛을 향해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여정은 다른 인물과는 사뭇 달랐다. 루터와 칼빈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고, 이냐시오와 테레사는 긍정의 길(kataphatic way)을 걸어갔다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부정의 길(Apophatic way)을 걸어갔다. 이렇게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길을 걸은 것은 각자의 영성형성이 독특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난한 직공 부부의 셋째 아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스페인의 척박한 땅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한 가난한 직공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폰티베로스는 인구가 약 5000여명 쯤 되는 작은 도시로, 아빌라의 테레사의 고향인 아빌라에서 북동쪽으로 24마일쯤 떨어진 곳이다. 원래 그의 아버지 곤잘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는 톨레도(Toledo)에서 비단장사에 종사하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예페스는 고아이자 가난한 직공이었던 요한의 어머니 카탈리나 알바레즈(Caltalina Alvarez)와 결혼함으로써 집안에서 쫓겨나 의절을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예페스의 가족은 톨레도를 떠나 폰티베로스의 극빈자들이 사는 구역에 보금자리를 꾸미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이 세 살 되던 해, 아버지 곤잘로는 전염병으로 인해 어린 부인과 세 아들 그리고 극심한 가난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가난이 얼마나 심했던지 요한의 둘째 형인 루이스(Luis)는 어린 시절 영양실조로 죽고, 첫째 형 프랜시스코(Francisco)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못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내 요한은 그의 몸에 항상 가난의 표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는 구루병으로 인해 키가 약150cm 밖에 자라지 않아 단신으로 살았다.

요한의 아버지가 죽은 후 요한의 어머니는 톨레도에 있는 예페스의 친가에 아이들을 맡기려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거대한 상업도시인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 Campo)에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요한이 9세가 되었을 때에, 알바레즈는 요한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 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곳에서 요한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묵을 곳을 제공 받았고,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요한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장사를 배웠지만, 어린 소년 요한은 장사에 대한 별다른 매력과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그곳에서 요한은 여러 가지의 직업들을 시도해 보았다. 지역의 장인들 밑에 도제로 들어가 목수, 재단사, 조각가, 화가 등으로 일했지만, 그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해서 차례로 해고당하곤 했다.


형성적인 '가난의 습관'

요한은 17세에 메디나의 한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학업에 대한 요한의 열의를 알아차린 병원 설립자인 돈 알론소 알바레즈(Don Alonso Alvarez)의 호의로, 요한은 메디나에 새롭게 세워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요한은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 그곳에서 라틴어와 헬라어, 종교와 수사학을 배웠다. 요한의 가난한 어린 시절은 그렇게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한의 가난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병원장 돈 알론소 알바레즈는 확실히 요한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보았던 것 같다. 요한이 21세가 되던 해, 알바레즈는 요한에게 서품을 받고 병원의 지도신부가 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자리는 요한이 가난을 벗어 날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세속적인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 요한은 보장된 미래에 안주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과 관상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메디나에 있는 갈멜수도회에 입회해 수사가 된다.

흔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결핍된 삶으로 인해 부에 대한 집착에 빠지기가 쉽다. 그런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기회와 수단을 활용해 부의 축적과, 신분의 상승을 꾀한다. 하지만 요한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가난’을 형성적인 에너지로 받아들였다. 곧 가난을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관상생활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자신을 투신하였다. 이를 안토니오 데 니콜라스(Antonio T. de Nicolas)는 ‘가난의 습관’이라고 한다. 곧 요한에게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습관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가난의 습관 속에서 육적 가난뿐 아니라 영적 가난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

갈멜수도회는 학문적 연구를 우선으로 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번잡한 대학의 도시인 살라망카(Salamanca)로 보내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1년간의 초심자 과정을 마친 뒤, 1564년에 살라망카 대학(University of Salamanca)과 성 안드레 갈멜수도회 대학(Carmelite College of San Andres)에서 4년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의 저명한 선생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지적 재능을 인정받아 성 안드레 대학의 학사장으로 임명받는다. 당시 요한을 목격한 증언자들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요한은 금욕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살라망카에서의 이러한 풍부한 학문적 경험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완전한 관상생활에 대한 매력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 order)로 전향할 것을 고려했다.

이처럼 요한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 받은 선-형성적인 차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요한은 세상적 부와 학문적 성취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 가운데 거하는 관상생활에 대한 내면의 근원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요한은 자신의 시 “어둔 밤(the Dark Night)”에서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Anxious, by love inflamed)”라고 노래했다. 이런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 요한은 하나님의 신비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맨발로 걸어가다

그러다 1567년에 요한은 사제 서품을 받고 그의 첫 번째 미사를 드리기 위해 메디나 델 캄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아빌라의 테레사를 만났다. 마침 그녀는 두 번째로 수녀원을 시작한 후에, 남자 수도원을 개혁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테레사는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에, 고독과 엄격한 삶에 대한 요한의 소명이 카르투지오 수사가 되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남자 수도원을 개혁하는 일을 통해 더 만족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요한을 설득했다.

그 결과, 요한은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갈멜수도회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568년 12월에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갈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맨발의’(discalced)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가 이렇게 불리워진 것은 그들이 맨발로 다녔기 때문이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한 켤레의 신발은 신을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들은 그 한 켤레의 신발마저 소유하지 않고 벗은 발로 다니기를 기뻐하였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철저한 가난과 금욕적인 삶,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때 요한은 그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꿨다. 십자가는 그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더욱 더 큰 영적 가난, 곧 어둔 밤을 향해 쉼 없이 걸어갔다.

이후 요한은 1577년까지 수도회의 초심자 수련담당과 맨발의 수도회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갈멜수도회 개혁을 위한 테레사의 활동을 도와 5년동안 수녀들을 대상으로 영적지도를 하고, 테레사의 영적지도자로서 테레사 가까이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 기간을 통해서 요한은 영혼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깊이 배웠다. 또한 요한은 죄인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적지도를 행하고, 주변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요한에 대하여 테레사는 그는 “신적이며 천상적인 사람”이고, 그녀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영적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어느 어둔 밤에

1577년 12월 2일 어두운 밤이었다. 그동안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신발을 신고 있는(calced)’ 갈멜수도회의 형제들에 의해 그는 눈이 가려진 채로 톨레도로 끌려가서 어두운 감방에 갇히게 되다. 그가 갇힌 곳은 평소에 손님을 위한 세면소로 사용되던 작은 방이었는데, 창문도 없고 오직 천장에 있는 작은 통풍구를 통해서 희미한 빛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간혹 찾아오는 몇몇의 수사들은 그에게 차가운 비난과 함께 음식만을 마루 위에 던져 놓고 돌아갔다. 그는 간수와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방을 옮길 수도 없었다. 요한은 좁은 방을 가득 채우는 악취로 인해 점점 병들어 갔다. 그의 등은 채찍질로 인한 상처로 가득했고, 그의 몸은 벌레로 득실거렸으며, 그의 옷은 썩어갔다. 그곳에서 요한은 거의 먹을 수도 없었고, 잘 수도 없었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로 숨을 헐떡여야 했다.

이와 같은 비좁고 고립된 감옥에서의 혹독한 고난은, 그동안 가난의 습관 속에서 맨발로 걸어 온 요한으로부터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위로와 소망을 박탈했다. 이것을 요한은 육과 영의 능동적, 수동적 어둔 밤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어둔 밤은 요한을 철저하게 정화시켰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게 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가난, 곧 어둔 밤 속에서 요한은 희미한 빛을 타고 오는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순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아홉 달 동안의 이러한 수감 생활의 경험 속에서 요한은 마음으로 시를 노래했다.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 중의 하나인 “영적 찬송”(Spiritual Canticle)과 “어둔 밤”이 이때 지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둔 밤”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아,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러운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자를

한 몸으로 묶어주는 밤이여”


이후 1578년 8월 요한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시 “어둔 밤”과 “영적 찬송”, “갈멜의 산길”(The Ascent to Carmel) 등을 완성하고 이에 대한 주석서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또 한 번 종교재판에 연루되어,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많은 작품들과 편지들이 폐기되거나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1591년 12월 14일에 갈멜의 성자 십자가의 성 요한은 평소 그가 사랑하고 자주 인용하였던 아가서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고선 침상에서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어둔 밤을 걸어간 맨발의 수사

이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을 맨발로 걸어가 주님의 품에 안긴 신비가이자 시인이며, 성자이자 수도회 설립자이면서 개혁자였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영적 여정은 당대의 개혁자들인 루터나 칼빈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유형의 길을 걸었던 것은 주위의 시·공간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이라는 사회·문화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요한이 메디나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고, 아빌라의 테레사의 개혁에 동참하며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그의 영성형성 과정에서 겪은 혹독한 가난과 고난은 요한으로 하여금 이냐시오나 테레사와는 다른 길을 걷게 했다. 곧, 요한의 내면에 선-형성된 하나님을 향한 불타오르는 갈망은 이와 같은 가난과 고난을 형성적인 에너지로 받아들여, 자신을 하나님과의 높은 관상적 일치로 날아오르게 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십자가의 성 요한을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유일하고 독창적인 존재로 형성해 가셨다.


『목회와 신학』2006년 12월호

유해룡, 권혁일


유해룡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