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즐거운 독서(Joyful Reading)' 모임을 위한 책소개와 토론 질문.




공부는

영성훈

이다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서울: 한솔수북, 2014.




 

   정말 좋은 질문은 지식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회의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 냅니다. 이 책의 저자 이원석은 “공부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런 질문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 질문이 미시적으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고, 우리가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고 생각한다.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삶을 변혁하고 사회의 미래를 재구성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15)


이렇듯 저자는 공부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개인과 사회, 현재와 과거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공부 또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기존의 자기계발서들과는 제목에서부터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이자 머리말의 제목은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초상이 일그러진 이유는 공부의 목표가 ‘지식을 축적’하여 ‘성공이라는 실리’를 얻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곡된 욕망의 실현을 공부를 통해 주도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실상이다. 우리의 사회적 위계는 우리의 학업적 위계에 연동되어 있다. …… 우리의 현세적 욕망이 공부의 목적이 되고, 공부가 현세적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부를 통해 들여다보는 우리 사회는 이토록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165)


저자에 의하면 참된 공부란 욕망 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의 방법입니다. 이원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를 동아시아와 고대 그리스, 그리고 중세 가톨릭에서의 공부의 개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파악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공부란 무엇인가’(공부의 정의), 2부에서는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공부법)라는 질문들을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제1장 “동아시아의 공부”에서 저자는 ‘공부(工夫)’라는 한자어가 ‘쿵푸’와 같은 단어라는 점을 들어 공부란 지적 노동과 몸의 수련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유학에서도 배운 것(學)을 몸에 새기는 것(習)을 ‘학습(學習)’, 곧 공부라고 말합니다. 지식을 담기 위해서 먼저 육체와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앎을 얻게 되면 그것을 삶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이렇듯 동아시아에서의 공부, 특히 유교 전통에서의 공부는 인격을 닦는 실천적 수양입니다.


    다음으로 제2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공부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philosophia’는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며, 철학자란 무지와 앎 사이에서 지혜를 사랑하여 추구하는 사람, 나아가 진실/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실천적인 용기(parrésia)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지식의 훈련 이상의 ‘영성 수련(spiritual practice)’이었다는 내용입니다(69).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학당들은 ‘생활 방식(a way of life)’으로서의 철학을 가르치는 학습, 생활 공동체, 즉 일종의 수도원이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이어지는 제3장에서는 중세 가톨릭 수도원에서의 공부가 다루어집니다. 저자는 수도원에서 성서나 교부들의 글을 읽고 묵상하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예로 들며, 중세 수도원의 공부는 자아의 변혁, 특히 욕망의 변혁을 목표로 하였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실천도 렉티오 디비나의 회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종합하면, 1부에서 저자가 고전적인 공부 개념에 근거해서 말하는 참된 공부란 진리를 깨우치는 것을 통해 자아의 변혁과 실천을 추구하는 인격 수양이자 영성 훈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참된 공부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제 2부로 넘어 가겠습니다.


    먼저 제4장에서 저자는 독서, 특히 낭독의 반복을 통해 고전의 핵심 문장들을 암송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낭독과 암송이 우리의 “요동하는 정념을 진정시켜” 주고, 우리를 “거대한 전통의 질서와 공동체 안에” 자리매김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113).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는 글을 인용하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사유는 묵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서 숙성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 결과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6장에서 제안하는 공부법은 ‘대화’입니다. 이 때의 대화란 정보나 감정 전달 이상입니다. ‘나와 너’ 사이, 곧 서로를 향해 열려진 주체와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지평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깊은 차원의 대화입니다. 2부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이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왜곡된 욕망 너머 공부의 길”이라는 제목이 달린 맺음말에서 저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바르게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찬란한 빛을 되찾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밝은 광명을 비추어 줄 것이다. 단언컨대 자기 자신과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부의 의미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회복은 바로 욕망의 변혁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를 통해 행복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행복은 공부 순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행복의 목표를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와 인격적 성숙으로 재설정하고, 공부의 목적을 우리의 마음을 세우고 나아가 몸을 바로 잡는 데 둔다면, 이는 결국 고전적 공부 방식의 통찰로 돌아가자는 촉구에 다름 아니다.(170-71)


이 책의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희망의 길은 공부에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바르게 공부하는 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부의 바른 의미를 되찾고 실천할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말한 “나만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립니다(173). “이 사회가 짜놓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180).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181). 나아가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가 진정 자유롭고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제2부에서 저자가 말한 공부법들, 곧 독서(낭독)와 암송, 사유와 묵상, 대화들이 모두 영성 훈련인 렉티오 디비나에서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렉티오 디비나는 (소리 내어) 읽기와 묵상, 그리고 관조(또는 관상, contemplation)가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된 훈련입니다. 또한 수도원에서 렉티오 디비나는 흔히 지도자와의 대화, 곧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와 병행됩니다. 그리고 바른 공부의 결과인 ‘자유’ 역시 영성 훈련의 결과입니다. 특히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가 고안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은 렉티오 디비나에 바탕한 ‘복음관상’을 주요한 훈련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영신수련의 열매는 ‘영적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매우 요약해서 말한다면, ‘공부란 영성훈련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듯합니다.


    동서양과 고금을 걸친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저자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확실히 이 책은 그가 공부의 방법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인용한 문구처럼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의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133). 그래서 작가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많은 지식으로 인해,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내용들로 ‘빠져서’ 결론으로 돌아서 간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제6장에서는 우정과 사랑에 대한 내용은 줄이거나 보론으로 다루고, 보론에 있는 “위대한 스승과 교육으로서의 대화”를 본론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었으면 주제가 더 강화되고 글의 일관성도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하는 이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어떻게 적용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독자의 숙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아쉬운 점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 공부


1.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공부의 의미와 방법과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비교해 봅시다. 어떤 비슷한 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이 책을 읽은 후에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2. 저자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기독교 수도원 전통에서 공부는 몸의 훈련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 몸을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공부가 몸의 훈련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3. 저자가 제안하는 공부법을 우리의 실제 공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수학이나 과학 등을 공부할 때에도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4. 실리를 추구하는 공부에서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공부로의 ‘방향 전환’이 있기 위해서는 공부의 바른 정의와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방향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이야기 : 렉티오 디비나


1. 저자는 QT(Quiet Time)를 인스턴트 묵상으로 분류하며, 한 본문을 일주일 동안 묵상하는 형태의 묵상을 제안합니다(127-28). 이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다음의 글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정성들인 기도는 관상을 얻게 해주며, 기도 없는 관상의 선물은 드물고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귀고 2세(Guigo II: ?-1188),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 엔조 비앙키 지음, 이연학 옮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왜관: 분도, 2010), 154-55.




귀고 2세가 쓴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The Letter on the Contemplative Life)>는 우리에게 <수도승의 사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조 큐티(QT)라고 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명한 영성 고전이다. 귀고 2세는 렉시오 디비나를 네 단계, 즉 독서, 묵상, 기도, 관상으로 설명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각각의 단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각각의 단계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독서와 묵상이, 묵상과 기도가, 그리고 기도와 관상이 어떻게 체험적으로 흘러가는지를 알면 영성 생활에서 어느 한 요소도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빨리빨리 읽기만 하고 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읽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부터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만 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를 마음을 다해 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해치우듯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의 체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관상의 경험을 자신의 영적 경험에서 아예 배제시켜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영성 생활에서 이런 병증을 습관화시킨 사람들은 기도에 결코 맛들일 수 없다. 성경을 읽다가 기도로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훈련의 기본이다. 위에 인용한 귀고 2세의 말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영성 훈련에 병증은 없는지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 이강학

출처 :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spirituality.co.kr/318



2. 아래의 ‘오늘의 말씀’으로 렉티오 디비나를 함께 실습해 봅시다.

Lectio (읽기)

Meditatio (묵상)

Oratio (기도)

Contemplatio (관상/관조)






오늘의 말씀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사도행전 17:10-13 /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