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속의 〈재의 수요일〉 그리고 〈흰 그림자〉:  

사순절에 읽는 T. S. Eliot와 윤동주



오는 2월 14일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이틀 앞둔 날이자, 기독교 전통 절기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회하는 약 40일 간의 기간이며, 그 첫 날인 수요일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되새기는 의식을 행한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아마도 재의 수요일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시는 T. S. 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의 장편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가 애독하던 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


윤동주가 어떤 점에서 이 시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2월 14일은 재의 수요일이고, 이틀 뒤인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지 73주기가 되는 날이므로 엘리어트의 시와 윤동주의 시를 함께 읽으며,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길을 하나 제시하고자 한다.



1. 황혼 속의 비상


T. S. 엘리어트는 20세기 영미권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첫 장편시인 〈재의 수요일〉은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가 영적 절망과 고갈을 통과하여 개인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내적 여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는 T. S. 엘리어트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옮겨간 지 약 3년 후인 193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시는 때로 그의 ‘회심시’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시는 모두 6부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마지막인 6부의 첫 두 연을 우리말로 옮겨 인용한다. 


 

재의 수요일

 

VI.


다시 돌아가리라 바라지는 않지만

바라지 않지만

돌아가리라 바라지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며

꿈들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꿈이 교차하는 황혼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이것들을 바라기를 바라지 않지만

넓은 창으로부터 화강암 해변을 향해

하얀 돛들이 여전히 바다를 향해 날아오른다,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이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의 엇나간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짧은 황혼 속에서 꿈들이 교차하고,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화강암이 빛나는 해변을 향해 믿음으로 비상한다. 이 순간 그는 희망찬 날개짓을 하는데, 이 날개들은 1부에서는 날기를 바라지 않고 허공만 칠뿐이었지만 여기서는 회복되어, 시적 화자는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로 비상한다. T. S. 엘리어트에게 황혼은 이렇게 전이와 비상의 시공간이었다.


황혼은 낮이 밤으로 바뀌는 때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시적인 순간이며, 그래서 인생의 덧없음을 맛보고 동시에 영원을 소망하는 종말의 때다. 재의 수요일은 이런 의미에서 황혼의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마에 재로 된 십자가를 받으며, “너는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음성을 듣는 이 날이 바로 이 황혼의 때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흙인 것과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부질없이 바라며 서성거리고 말 것이다. 육지를 떠나 바다 위 하늘로 비상하지 못할 것이다.



2. 황혼 속의 깨달음


윤동주 시인이 T. S. 엘리어트의 시를 애독할 무렵에 쓴, 〈흰 그림자〉라는 시에도 ‘황혼’이 등장한다. 그가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첫 학기에 쓴 이 시는 황혼 속에서 그가 경험한 신비한 깨달음이 기록되어 있다. 곧, 윤동주에게 있어서 황혼은 깨달음의 시간과 공간이다. 그의 육필원고에 기록된 원문을 현대 국어의 맞춤법으로 일부 수정하여 인용한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 14.


 

시인은 황혼 속에서 땅검(땅거미)이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황혼과 동의어인 ‘땅검’은 해질녘의 어스름한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원래 시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황혼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일 때 놀랍게도 그는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곧, 황혼이 청각적으로 경험된다. 시카고 대학 교수 버나드 맥긴(Bernard McGuinn)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가들은 보통 자신들의 하나님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러한 공감각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언어로 담아내기 불가능한 초월적인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적 언어, 특히 모순되는 감각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공감각적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동주는 황혼 속에서 어떤 영적 체험을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시인은 자신이 땅거미의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이 지적인 총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발견되는 깨달음, 또는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은 지식이나 총명이 아니라,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시든 귀”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은 그날 하루 많은 말들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비단 말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땅에서 살아가던 식민지 청년의 하루는 그의 영혼을 시들게 할 만큼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시든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황혼을 향해 그의 지친 전 존재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그에게 새로운 영적 경험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시인은 황혼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는 이 시에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결과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재의 수요일〉에서 T. S. 엘리어트는 꿈들이 교차하는 황혼 속에서,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향해 비상하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 윤동주가 돌려보낸 것은 “괴로워하던 나”이므로, 비록 ‘돌려보내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T. S. 엘리어트와 마찬가지로 미래 지향적인 결정, 또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돌려보낸 ‘나’들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흰 그림자들”이다. 보통 윤동주가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은 시인이 사랑하던 조선인들, 곧 ‘백의민족’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때는 그가 사랑하던 민족을 왜 그 마음에서 돌려보냈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림자는 원래 검은 색이지만, 시인의 그림자는 흰 색이다. 흰색의 그림자란 태양 아래서 볼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니 허상이다. 그러므로 결국 시인이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괴로워하던 나들은 참된 나와 통합을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고장에 돌려보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흰 그림자들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흰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흰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어둠은 자신의 허상인 흰 그림자를 발견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가 어둠을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로는 우리의 영적 여정 중에 ‘어둔 밤’과 같은 시기가 있지만, 이 시기는 우리의 환상적인 자아를 발견하는 복된 시기다. 또한 시인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발자취 소리가 들리는 땅거미와 대조를 시킴으로써 그것들의 비현실성을 다시 부각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모양도 소리도 없는 비현실적인 나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 연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돌려보낸 후 허전히 방으로 돌아와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양은 먹이 사슬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매우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양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것은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풀포기나 뜯는 평화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또한, 풀포기를 뜯을 수 있는 양은 선한 목자를 가진 양, 그리고 그 목자를 신뢰하는 양이다(시편 23편 참조). 결국 이 시는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 그리고 목자에 대한 신뢰로 끝을 맺는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시인은 황혼 속의 깨달음 뒤에도 여전히 침략자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식민지 청년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괴로워하는 나가 아니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으로 살고자 한다. 내적 변혁이 일어났다.



3. 황혼에 귀를 기울이면

 

다시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을 생각한다. 주일을 제외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마흔 번의 황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낮과 밤, 빛과 어둠, 그리고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황혼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도 T. S. 엘리어트처럼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서성이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또는 청년 윤동주처럼 나 자신의 흰 그림자들, 내가 집착하는 환상적인 나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절망, 슬픔, 피로 등 이 모든 것들을 담아 시든 귀를 열어 황혼에 귀를 기울인다면, 또는 석양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우리도 T. S. 엘리어트처럼 부러지지 않은 날개로 바다를 향해 비상하거나, 윤동주처럼 흰 그림자들을 돌려보내고 시름없이 풀포기를 뜯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글은 원래 2016년 2월 10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팀블로그에 게재한 것인데, 조금 수정하여  「좋은교회」 2018년 2월호에 기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