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부터 시작해서 각종 수련회가 이 여름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 수련회에 참석하고, 또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에 힘입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갈 것이다. 은혜, 은혜, 은혜, 이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이다. 아마도 ‘은혜’라는 말은 굳이 수련회라는 환경이 아니더라도 ‘십자가’나 ‘구원’과 같은 단어와 더불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다음으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적으로 은혜(χάρις)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을 의미한다. 영어사전 《메리암-웹스터》(Merriam-Webster)에서는 은혜(grace)를 “인간의 갱생(regeneration)과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도움”이라고 정의한다. 넓은 의미에서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은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매우 고귀한 선물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성경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알려 준다(출20:6, 시86:15, 사30:18).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특별한 선물을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선물’이란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찾는다면, 그것은 ‘당연히’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받는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선물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선물을 당연히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보상’이다. 선물은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주는 사람의 호의나 자비로 인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캐럴송에서 “울면 안 되, 울면 안 되,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라고 노래하는 것은 선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원래 마음씨 좋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착한 아이들이나 나쁜 아이들이나 차별 없이 모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어떤 특별한 공로가 없는 무익한 존재인 나, 심지어 때때로 죄를 짓고 그 속에서 뒹굴기까지 하는 악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고,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선물을 주신다는 역설적인 진리다(마5:45, 롬5:8). 곧, 나는 그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모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약1:17). 다시 말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매일 아침 창을 넘어와 우리를 깨우는 아침 햇살, 한낮의 나무그늘과 시원한 산들바람, 고단한 마음과 육체를 쉬게 하는 밤, 매 끼니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선물의 절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과 마찬가지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선물로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이러한 진리의 발견, 곧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수반한다. 선물을 받게 되면,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받게 되면 마음이 기쁨과 감사와 경이로 벅차오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슬픔과 혼란 속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길에서 만난 주님이 성경을 풀어 주시는 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되자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체험하였다(눅24:32).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뒤따라오는 것이 감정적 반응인데,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는 것보다 그 선물에 따라오는 감정적인 느낌을 더 추구한다. 그래서 찬양을 빠른 비트에 맞추어 열광적으로 부르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은혜를 받은 느낌’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빠른 찬양과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 의하면 정서(affection)가 하나님의 은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감정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게 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당연히 일어나지만, 깨달음 없이 감정적 뜨거움이나 만족만을 추구하다보면, 쉽게 김이 빠지는 공허한 열광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내면의 변화 없이 ‘종교적 신경안정제’나 ‘종교적 마약’을 흡입하는 것과 같아서 감정이 식은 뒤에는 더욱 강렬한 감정적 자극이 아니면 만족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닫게 될까? 이에 대해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을 여러 가지 소개할 수도 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성경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불린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다. 복음서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가 이렇게 인사하였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 이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른 가장 본질적 이유는 바로 주께서 그녀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은혜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무리 중의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눅11:27-28). 그러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서 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마리아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심의 결과였다. 그녀는 가브리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녀인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순종할 수 있었다. 즉,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복된 자였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핵심적인 영성훈련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슬픔과 절망으로 눈이 가리워서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에게 깨달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붙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났고, 그래서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도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를 보아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사경회(査經會)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날 때 일어났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남한산성의 ‘영락수련원’에서 제공하는 영성훈련 프로그램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말씀묵상수련인데, 이것은 영성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에서 말씀과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봉사자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힘을 쏟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칠 때에는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에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개방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말씀이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마리아처럼 단순히 순종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 여름에 무엇보다 말씀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자. 수련회는 물론 휴가를 떠날 때도 말씀을 손에 들고 가자. 참된 쉼과 회복은 말씀과 만나고, 그 안에 거할 때 일어날 것이다.
「남문밖 기쁜소식」 309 (2019년 7-8월), 10-13쪽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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