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새벽이다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련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쪽으로 훤-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 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일제강점기말, 윤동주 시인은 별똥 떨어진 데라는 수필에서, 자신과 우리 민족이 처해 있던 암담한 현실을 이라는 이미지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칠흑 같이 매우 어둡고 깊은 밤이었습니다.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 보다.”는 그의 말처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1230일에 태어나, 일제가 지배하던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에서 약 만 272개월을 살다가,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21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윤동주와 당시 한민족이 살았던 시대가 더욱 암울했던 이유는 그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수필에서 닭이 홰를 치면서 울어 새벽이 동터온다 하여도 이 마을, 곧 조선은 여전히 암담할 뿐이어서 한밤의 어둠 속에서 깜박깜박 졸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의 아름다운 풍경도 실은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일 뿐이라며 슬퍼합니다. 진정한 새벽, 참된 아침은 조국이 광복될 때에야 오게 되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을 잃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그들은 여전히 캄캄한 밤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정오에 온 땅을 덮은 어둠이(15:33) 제자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 시간 후 세상이 다시 밝아지고, 또 그날 밤이 지난 후 여느 때처럼 토요일 새벽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혼란과 절망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과 같은 안식일이 지나고 난 후, 다음 날 새벽 몇 명의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24:1)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아직 어두울 때에”(20:1), 곧 새벽이 채 오지 않은 밤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고 기대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 곧 죽은 몸이었는데,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빈 무덤이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곳에 있던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남아 슬퍼하며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 속에 있던 그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주님이 그저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애절하게 부탁했지요. 그러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찾던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랍오니(선생님)”라고 주님을 불렀습니다(20:14-16). 마침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깨어지고, 새벽이 힘차게 동텄습니다.

새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에 ‘daybreak’(데이브레이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태양빛이 처음 나타나는 때를 뜻하는 말로써, ‘’(day)부서지다/부수다’(break)라는 두 단어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새벽은 말 그대로 낮이 밤을 부수고 갑자기 출현하는 때입니다. 밤이 깊고 깊어져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갑자기 동쪽에서 태양빛이 나타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면, 밤은 깨어져 버립니다. 굳게 닫힌 밤의 철문을 깨어 부수고 새벽이 갑자기 출현합니다. 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단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때가 새벽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이에게는 죽음의 밤이 끝나고 낮과 같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점에서 부활은 새벽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자 했던 것은 죽은 예수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놀랍게도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었습니다. 깊은 밤 속에 있던 마리아에게 드디어 부활의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의 기존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죽음과 슬픔의 밤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찬 환한 낮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밤 속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숨은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과 죽음의 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에야 그들도 부활의 새벽을 맞게 되었지요(20:19-21). 이처럼 부활의 새벽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에야 열립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단 세 번의 새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던 태초의 새벽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명령하심으로 지금까지 전혀 없던 새로운 세상, 빛과 질서의 새벽이 열렸습니다(1:1-3). 이것이 온 세상의 첫 새벽입니다. 이 첫 번째 새벽은 과거에 이미 완성된 새벽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새벽은 부활의 새벽입니다. 이 새벽은 약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새벽은 교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경험해야 참으로 맞게 되는 새벽입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날 때에, 그는 마리아처럼 내가 주를 보았다”(20:18)라고 외치며 비로소 그 새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은 천국의 새벽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간 뒤, 장차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 눈을 떠서 보게 될 빛의 세계가 바로 이 새벽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맞는 새벽은 모두 천국의 새벽을 표상합니다. 밤마다 눈을 감고,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은 이 땅에서 죽고, 천국에서 눈을 떠서 완전히 새로운 새벽, 영원한 새벽을 맞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빛나는 새벽별이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과 하나가 되게 될 것입니다(12:16).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새벽은 이러한 천국의 새벽을 통해 온전히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찾아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상에 죽음의 기운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참으로 깊은 밤입니다. 그러나 새벽을 맞는 방법은 밤을 겪어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비록 캄캄한 밤이 끝이 없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새벽은 반드시 어둠을 부수고 밝아 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깊은 밤에 태어나서, 깊은 밤을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시대처럼 올 아침을 밤을 새워 기다렸습니다(쉽게 씨워진 시). 너무나 안타깝게도 비록 그는 그 광복의 아침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그가 기다렸던 아침이 거짓말처럼 힘차게 도래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세상이 어둠으로 덮이고, 우리 삶에도 깊은 밤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새벽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고야 말 것입니다. 밤을 부수고 힘차게 도래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언젠가 죽을 육체 속에서 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마지막 새벽에는 영원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주일은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부활의 새벽은 천국의 새벽을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손을 잡고 그 새벽을 기다립시다. 마리아처럼 아직 어두울 때에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나아갑시다.

 

-영락교회 〈만남〉(2020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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