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기도주간을 얻었다. 홀로 한적한 곳에 들어가서 며칠 보내고 싶었으나, 여름 동안 여러 가지 사역들로 집을 많이 비웠기 때문에, 올해 기도주간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낮에는 아무도 없으니, 저렴한 비용으로 고독을 즐기기에 이만큼 적합한 장소가 또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아내에게 인사하고, 아이를 준비시켜 유치원에 보낸 후,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난 여름 만난 사람들, 있었던 일들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특히 안타까운 교인들의 사연과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에서 만난 목사님들의 모습이 진한 안개처럼 부유한다.

 

내일은 여름이 지나가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이다. 옛날 선비들은 이 무렵에 여름 장마에 젖은 책을 그늘에서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햇볕에 쬐이는 포쇄(曝曬)를 했다고 한다.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책상에 앉아 서가에 꽂힌 채 먼지 앉은 책들을 바라본다. 책 한 권 한 권에 얽힌 추억들이 생각나고, 그 책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기도주간을 보내며 눅눅해진 책들과 젖은 마음을 꺼내어 놓고 나름의 음건과 포쇄를 해야겠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페이스북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고, 카카오톡에서도 사라지리라.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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