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5. 목


정호승의 《여행》이라는 시집을 잃고 있는데, 시인이 부친을 여의고 난 뒤에 적은 시편들이 내게 적잖이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라는 시를 읽는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버님 면도도 해드리고, 손톱도 깎아 드리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시인이 참 부러웠다. 중환자실에 계시던 아버지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 그래도 마음에 와닿았던 시 한 구절을 적어 놓자.


이슬이 햇살과 한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이슬은 울지 않는다

햇살과 한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 뿐

이슬에게는 슬픔이 없다


- 정호승 <이슬의 꿈> 부분



2013. 9. 14. 토.


추석이 다가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 오늘은 한국에 있는 동생 가족이 추석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 놓은 추모관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아직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어린 조카는 종이에다 팥빙수 한 그릇을 그려서 유리장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옆쪽에서는 한참 동안 추모예배를 드리는 가족이 있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동생네는 "아버님,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돌아왔다고……. 나도 잠자리에 누워 그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2013. 9. 16. 월.


오늘은 어머니랑 평소보다 더 오래 전화통화를 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가 마침 어머니께서 암의 전조를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신 직후였다. 아버지에게도 그런 전조 중의 하나가 나타나서 지역의 중형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그냥 감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짧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병을 키운 것을 속상해 하셨다. 그래도……, 그래도……, 30여 분 동안의 통화 끝에 어머니께서 맺은 말은, 그래도 이제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아픔과 그리움을 견뎌내고 계시다.



2013. 9. 18. 수.


여기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0시, 한국 시간으로 오후 4시, 부산과 서울, 그리고 이곳 버클리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두 컴퓨터 앞에 모였다. 그리고 화상통신을 통해서 함께 추석가정예배를 드렸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나도 해외에 있고, 서울에 사는 누나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산에 내려가지 못한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동생 가족만 드릴 추도예배가 너무 허전할 것 같아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너무 마음이 안 좋으면 며칠이라도 한국에 다녀오라며 권했지만,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동생이 농담처럼 화상통신을 이용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것이 이렇게 실현되었다. 다같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같은 시간에 함께 연결되어 추도예배를 드리니 참 반갑고, 기뻤다. 아마 다음 명절에도 나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컴퓨터를 통해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겠지. 가족들과 만나 손도 잡고, 함께 밤새워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그런 명절이 얼른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추도 예배를 마무리하며, 아마도 작년 가을에 아버지께서 메모지에다 적어 놓으신 추석 인사말을 함께 읽었다. 

 

가을 하늘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가족과 이웃 간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추석을 계기로 우리 가족의 마음의 상처들도 잘 아물어 가기를…….



2013. 9. 21. 토.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갑자기 연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외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니, 이산가족의 아픔을 백만분의 일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절에도 화상으로도 만날 수 없고, 서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그분들의 절망과 상처는 얼마나 클까? 이산가족 상봉을 두고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 자존심 등을 따져서는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