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5장 7절 

제목 : 긍휼의 사람

주후 2014년 6월 8일


바다와 독약

     지난 3월부터 우리 교회 “조이 북까페”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한 권을 읽고 나누는 독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독서 모임의 이름은 영어로는 “Joyful Reading”, 우리말로는 “즐거운 독서”입니다. 그러나 독서가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책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떤 책들에는 말로 다 담아 낼 수 없는 고통과 상처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독서 모임 첫 번째 도서였던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가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한 여인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어 가며 치유와 용서의 길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책 속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Joyful Reading”이라는 말보다 “Painful Reading”, 곧 “고통스러운 독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우의 독서에서 사실 가장 즐거운 때는 책을 읽은 이들이 함께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매개로 함께 모여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독서 모임은 참여하는 분들이 함께 성장해가는 매우 즐거운 시간입니다. 책은 함께 읽고 나누는 벗이 있으면 더욱 깊은 의미가 나타나고, 그 즐거움이 더해집니다. 제가 이 독서 모임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그 즐거움을 조금 나눠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유월에 함께 읽고 있는 책은 엔도오 슈우사꾸라는 일본 작가가 쓴 《바다와 독약》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한 비인간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부 사건’인데 대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군 폭격기가 추락하면서 그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던 열두 명의 미군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여덟 명이 재판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큐우슈우 대학 의학부에서는 은밀히 군에 접촉하였습니다. 어차피 사형집행을 당할 포로들이니, 자신들이 의학 연구를 위해서 생체해부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험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폐 절제 수술을 할 때에 폐를 얼마나 남겨 두어야 사람이 죽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포로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병원의 수술대 위에 눕혀졌고 멀쩡한 장기가 잘려나가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잔인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내면과 태도입니다. 소설에서 생체 해부를 아주 흥미롭게 구경하던 일본의 군의관들은 무리한 폐절제로 포로가 죽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별 것 아니네!”라고 서로 농담하며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파티를 위해 포로의 생간을 특별히 주문해서 술안주로 삼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이들의 비인간적이고 무정한 모습은 얼마 전 침몰한, 그리고 여전히 실종자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 앉아 있는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을, 도저히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 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인면수심’ 곧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짐승의 마음을 가진 이들의 예를 너무나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친딸을 감금해 놓고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면서도 태연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들, 같은 여자이면서 젊은 여인들을 잡아다가 윤락가에 팔아 넘기는 사람들,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위협하는 해로운 음식물을 파는 이들…….


     그런데 한 가지 섬뜩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도깨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얼굴로 우리 사회에 섞여서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바다와 독약》의 첫 번째 장도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약 10년 후, 일본 도쿄 인근의 신흥 주택지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곳의 양복점 주인은 태평양 전쟁 때 헌병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경험이 있고, 동네 작은 의원의 의사는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부 사건에 가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래서 작가 엔도오 슈우사꾸가 이 책에서 의도하는 것은 소수의 악한 사람들,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매우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내면 가운데에 독약처럼 퍼져 있는 악을 폭로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작가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 생체해부 실험에 가담했던 토다라는 의사의 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 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로부터 벌 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느 날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 엔도오 슈우사꾸, 《바다와 독약》 (창비, 2014), 136.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혹시 세월호 사건이 여러분에게는 커다란 이슈나 흥밋거리이긴 하지만, 사고로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이나 고통으로 흐느끼는 유가족들에 대해서는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서의 슬픔을 긍휼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신문지 위의 잉크가 마른 글자처럼 매일 같이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사건과 재난과 고통의 소식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지나가는 뉴스나 정보로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히려 그런 뉴스들보다 날씨, 환율, 주가, 부동산, 쇼핑 정보에 더 큰 관심을 갖지는 않으십니까?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쁜 일들을 저지르는 것에는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밖으로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약간의 세금 탈루, 규칙 위반, 사소한 거짓말들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찬양을 하고, 교우들과 웃으며 교제를 나누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지금 그러시다면, 또는 과거에 그러셨다면, 소설 속의 의사 토다의 질문처럼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은 없으십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작가는 이기심, 정욕, 미움, 무관심 등의 악이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독약처럼 퍼져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악을 해독할 수 있을까요? 그 끔찍한 악들의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엔도오 슈우사꾸는 소설에서 그 해독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기독교 영성 고전인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참조해 볼 수 있습니다. 4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였던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육체적 쾌락과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약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입니다. 사람을 짐승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로 만드는 독약의 해독제는 바로 ‘긍휼’입니다.


거짓 긍휼과 참 긍휼

     오늘의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제가 받들어 읽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8)


여러분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에서 ‘긍휼(矜恤)’이란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긍휼이란 비극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품는 것, 나아가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긍휼이란 단순히 불행 가운데 있는 자를 동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직접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긍휼은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참된 긍휼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만족’으로서의 거짓 긍휼에 대한 예를 다시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연극, 특히 비극 관람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는 서럽고 슬픈 일을 당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왜 극장에 가서 그런 일을 구경하면서 슬퍼하려고 합니까? 관객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려고 하오니, 그들에게는 슬픔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야말로 불쌍하고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하지만 꾸며 낸 연극 줄거리에 도대체 무슨 동정이 필요합니까? …… 그리고 만약 연출자가 사람들이 당한 불행한 일들을 연출할 때에 관객의 슬픔을 자아내지 못하면, 관객은 재미없다고 불평하며 퇴장해 버리나, 만약 슬픔을 느끼게 되면 그 관객은 재미있다고 즐거워하며 계속 앉아 있나이다.” (5.2.2)


     이 부분에서 어거스틴은 슬픔을 재미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슬픈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코끝이 찡한 적이 거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여기서 어거스틴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세익스피어의 대표적인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 1968년에 나온 한국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런 작품들은 관람객들을 정말 많이 울렸습니다. (아마 여러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슬픈 영화나 연극을 사람들이 보는 이유는 바로 다른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이런 것은 진정한 동정, 참된 긍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슬픔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참된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진정으로 올바른 동정심을 가진 자는 오히려 아픔을 일으키는 원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긍휼은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의 마음을 품는 것에서 나아가, 그 아픔을 일으키는 원인이 제거 되도록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에까지 나아갑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2장의 말씀처럼 먹지 못해서 배고픈 자에 대해서는 그를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배고픔이 해결되도록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참된 긍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긍휼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

     가장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처럼 나의 마음, 나의 생활에 있는 악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약이 필요하다고 주님께 진솔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동정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대부분의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위치에 있기를 바라지, 긍휼을 받는 위치에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서도 자신이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의롭고 완벽한 삶을 사셨습니까? 그래서 예배 드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아니면 지난 한 주 사시면서 ‘악한 마음’을 품었던 일이나 ‘악한 행동’을 한 기억이 떠오르십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치료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바다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기독교에서부터 예배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키리에 엘에이손(Kyrie eleison),” 번역하면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찬양/기도를 드렸습니다. 


     긍휼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편 85:15)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배울 때에 참된 긍휼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그대로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이들에게 내가 어느 정도까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긍휼을 받았는지를, 또는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적은 긍휼을 입었다면 적은 긍휼을 베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하신 긍휼을 입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긍휼을 모르는 사람은 참된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자기연민’이라는 사슬로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불쌍해 여길 때 그 사람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방을 원망하며 내가 저런 사람이랑 만나서 이렇게 고생하며 산다고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면, 그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보통 부모님들은 자기 자신보다 자녀들을 더욱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긍휼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시편 103:13-14; 이사야 49:15).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보다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면 그 가정이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가족을 더 불쌍히 여기십니까? 아니면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십니까? 이런 원리는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 또는 이웃들과의 관계로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체험하는 사람은 자기연민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큰 긍휼로 바라보고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주자주 하나님의 긍휼을 묵상합시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를 얼마나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생각합시다. 어떤 슬픔이나 고통을 만난다면, 그 캄캄한 밤과 같은 때에도 나에게 빛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긍휼에 감사합시다. 어떤 기쁜 일이 생긴다면, 나는 자격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특별히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계시다면, 그 평범한 날 속에서 햇빛과 공기와 같이 날마다 우리에게 임하시는 주님의 긍휼을 깊이 생각합시다. 당장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참으시는 주님의 긍휼을 찬양합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묵상하고 체험할 때 다른 이들에게 참된 긍휼을 베푸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긍휼을 원하시지,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는 십일조는 드리지만 긍휼을 버린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 예배, 십일조, 교회 봉사 등을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입장에 있다기보다 긍휼이 필요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하십시오.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만한 것이 없다고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다시 《바다와 독약》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소설에는 아베 미쯔라는 한 환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공동입원실에서 치료를 받으며, 옆 자리에 있는 자신보다 사정이 딱한 환자에게 다음과 같은 책을 읽어 줍니다. 


“석가모니께서 어느 날 …… 한 제자를 문병하셨습니다. …… 제자는 자신의 똥오줌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 석가모니께서는 정중하게 문병하신 후, 너는 건강할 때 친구를 간병한 적이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처럼 홀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 네가 평생 다른 사람을 간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 몸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삼대에 걸쳐서도 다 끝나지 않는 마음의 병이 있다.” (150)


엔도오 슈우사꾸는 기독교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가져온 것은 이 이야기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보여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석가모니는 고통 속에서 홀로 투병하고 있는 제자에게 그가 홀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도 평생 다른 사람을 간병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가 아플 때 돌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자신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좀 더 강도가 높은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야고보서에서는 심판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긍휼히 여김 받는 것 말입니다. 긍휼히 여김 받는 것이 무슨 복이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복은 ‘물질의 복’, ‘건강의 복’에 비해 별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긍휼히 여김 받는 복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삶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을 지금 유학 생활 중에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남편을 더 긍휼히 여기는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부족한 교역자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교우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나눔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오늘 친교 시간이나 성경공부시간에 여러분께서 받은 긍휼을 함께 나누어 보시도록 권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건강은 약하더라도, 자신보다 나를 긍휼히 여겨주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 그런 형제, 자매들과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 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나아가서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의 긍휼을 입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돈이 좀 부족해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이나, 가방, 신발 등이 허름하고 유행에 좀 뒤쳐져도, 지금 건강이 좀 약해도, 남들보다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해도, 낡고 오래된 자동차를 타더라도, 좋은 집에 살지 못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성경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이런 자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악이 독약처럼 퍼져있습니다. 소설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일 일어나도록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이들, 승객은 구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과 생명만 챙긴 승무원들, 인면수심의 성폭행범들, 일제강점기의 침략자들과 협조자들, 아우슈비츠를 통해 집단학살을 자행한 사람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대량학살을 일으킨 사람들, 원전비리로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들, 국민들은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돌보지 않는 아프리카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정치지도자들, 끝없이 부를 축적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리면서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신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기업가들, 그리고 남이 보지 않는 사소한 불법, 편법, 비리, 위법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소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세상 곳곳에는 악이 독약처럼 퍼져있습니다. 그 독약에 대한 해독제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베푸는 긍휼이 그 해독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독되어야 할 사람들임인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로 해독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까이서는 가족, 이웃들에게 베푸는 긍휼이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반유대주의는 소년 시절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가족과 주변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면, 그와 같은 큰 비극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당신은 긍휼의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