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7. 화.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두 분의 인생 선배님들이 돌아가신 부친의 통장과 관련된 일화들을 적으신 것을 읽었다. 아름답고 따뜻했다. 그 글들을 읽는데 자연스럽게 작년 5월 14일 오후가 생각났다. 


그날은 사랑하는 아버님의 시신마저 뜨거운 불 속에 넣은 날이었다. 재로 변한 아버님의 육신이 담긴 뜨거운 유골함을 가슴에 않고, 추모 공원으로 갔다. 죽은 사람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의 말씀으로 장례의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다. 그렇게 아버님의 유해를 추모관에 안장하고 집에 돌아오니 점심 때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식구들은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배달을 시키고, 난 그 사이에 두 가지 일을 보러 집에서 나왔다. 하나는 아버님의 옷 중 깨끗한 옷 몇 벌을 세탁소에 맡기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그 옷들을 그냥 버리기 아까우시다고 해서 세탁한 뒤에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하기로 했다. 아버님의 흔적이 배어있는 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고 나오는데, 또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졌다. 이 옷들이 걸쳐졌던 그 왜소한 육체는 이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길거리를 걸으며 눈물을 훔치다가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고 은행으로 향했다. 


두 번째 볼일은 아버님의 통장을 정리하는 법을 은행에 가서 물어 보는 것이었다. 가능한 빨리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필요한 서류와 절차를 미리 알아 두려고 갔다. 아버지께서 평소 다니시던 동네의 한 은행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며, 들고 간 아버지의 통장들을 열어 보았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잔고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아버지의 주거래통장은 '항상' 잔고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돈이 얼마 없으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난하셨는지 몰랐다. 간혹 목돈이 들어오면, 그 다음 지출란에는 어김없이 내 이름이나 어머니 생활비 통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통장에 찍혀 있는 내 이름들을 보는데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죄송했다.


아버지는 쉰아홉이 되시던 해에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셨다. 당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에 가기 위해 도서관에 다닐 때였다. 동생은 여전히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동생은 학생 때에도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자신의 용돈은 스스로 벌어 썼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용돈을 부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다. 나도 과외나 학원 강사와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공부를 핑계로 그리 오래 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에 책임감이 강하시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으로 군수품을 납품하는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동업자를 잘 못 만나 고생만 하시고 많은 손해를 보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공장에 가서 몇 번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는데,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애처롭고 또 대학 졸업 후에도 여전히 도서관만 다니고 있는 내 모습에 너무 죄송했다. 그 사업을 그리 오래 하지는 못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국가에서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직업교육훈련원에 다니시며 컴퓨터 활용법을 교육받으셨다. 원래 아버지는 이전에 직장 다니실 때부터 컴퓨터를 다루시고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시기도 했지만, 보통의 연세 드신 분들과 달리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도 동생이 사드린 스마트폰 사용법을 열심히 익히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교육 받은 것을 활용하여(당시 교육수료자를 채용하는 회사에 6개월 간 월급의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해주었다) 지인의 회사에서 일하시게 되어 오 년 동안 매 달 얼마씩 월급을 받으셨는데, 그것을 모아 두었다가 내가 유학을 떠나올 때, 그리고 중간에 내가 학비가 부족할 때 보태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은행에 앉아 아버지의 통장을 보고 있는데, 내 손에 들려 있던 번호가 불려졌다. 마침 창구에서 나를 맞는 직원이 평소 아버지님께 친절히 대해 주시던 여성 대리님이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그분께 아버지의 통장을 내밀고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올라와 도저히 입을 열수 없었다. 아무리 슬픔을 삼키려고 애를 써도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상복을 입고 충혈된 눈으로 한참 동안 서있는 나를 바라보던 대리님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힘 내세요." 그 말을 듣는데 참았던 눈물이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가까스로 "다음에 올게요."라는 말을 남긴 채 다시 통장을 챙겨서 돌아 나왔다. 그렇게 은행을 나왔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 갈 수가 없었다. 장남인 내가 그렇게 부은 눈으로 들어가면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 다른 가족들 역시 슬픔의 늪에 빠질 것이 뻔했다. 다시 혼자 울며 길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다 너무 늦으면 가족들이 걱정할까 하여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주문한 음식이 배달되었고, 가족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아침 일찍 발인하느라 다들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 했던 터였다. 나는 다른 식구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며 그냥 쉬어겠다고 말했다. 걱정이 된 아내가 방으로 따라 들어와 눈이 퉁퉁 부은 나를 보고는 이부자리를 봐주고, 가족들에게는 걱정하지 않도록 적당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오후 난 이불 속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날 밤도, 그 다음 날 밤도, 며칠 동안 가족들 몰래 밤마다 울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의 수첩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수록 4대 고통이 따른다. 질병, 고독, 경제적 빈곤 그리고 역할 상실."


난 아버지께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몰랐고, 아무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다. 공부하느라 오랫동안 부모님 곁을 떠나 있었고, 멀리 있어서 아버지께서 얼마나 편찮으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4개월 전,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갔다가 예전보다 훨씬 쇠약해지신 모습에 놀라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편찮으신지 몰랐다. 특히, 아버지께 경제적으로 도움은 커녕 부담이 되어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신대원에 다닐 때에도,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오를 때에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을 그만 두셔서 수입이 없으실 때에도, 늘 나에게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아버지한테 말해라고 말씀하셨다. 전화통화를 할 때에도 자주 "힘들제?"라고 물어봐 주셨다. 물론 나는 학비가 없어서 애를 태울 때에도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종종 내게 보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쓸 수 있도록 얼마의 예금통장도 따로 만들어 놓고 계셨다. 


사실 아버지는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하셨다. 오래된 연립주택이라 이런 저런 문제들도 자주 발생했고, 뒤에 들어선 이층 주택이 창문을 가려 방이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단풍놀이나 벚꽃 구경도 가시고 싶어 하셨는데, 몸이 약해지신 이후로는 한 시간 이상 차를 타는 것도 부담이 되어 포기하셨다고 했다. 대신 전망이 괜찮은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어 하셨으나 돈이 많이 모자라서 그것도 못 하시고 낡고 어두운 연립주택에서 살고 계셨다. 그러한 아버님을 좋은 곳으로 모시기는 커녕 나는 아버지 통장의 잔고까지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께 너무 죄송한데, 정말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값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오늘 우연히 컴퓨터를 뒤지다가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내가 쓴 신대원 졸업논문을 읽고 쓰신 글을 읽었다. "혁일이가 형식화된 경건적 신앙을 벗어나 신령한 품성으로 허약한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어려운 과정 중에서도 개척되어 나가는 면모를 볼 때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따라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찬란하고 성스러운 도전 앞에 있는 나의 아들에게 그 꿈 이루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라고 쓰셨는데, 좌절하지 말고, 오랜 공부의 마지막 단계인 학위논문을 정말 정성들여 잘 써야겠다. 이것이 아버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날 밤, 아버님의 퉁퉁 부은 손을 잡고 내가 드린 마지막 약속이기도 하니까.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벌써 일 년 오 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나의 마르지 않는 눈물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