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유고, 《내적 체험(The Inner Experience)》의  제13장이다. 여러 해 전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함께 수업 듣는 학생들과 함께 읽기 위해서 번역한 것인데, 얼마 전 컴퓨터 문서함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번역이 거칠지만 머튼의 글에는 힘과 깊은 통찰이 살아 있다. 그의 '죄의식(sense of sin)'과 '죄책감(sense of guilt)'의 구분은 예리하고 뼈아프다. 또한 관상가의 사명은 죄의식이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관상가의 정체성을 예언자의 전통 안에 위치시킨다. 머튼이 50여년 전에 쓴 글이지만 오늘날의 상황에 잘 맞아 떨어져서 다시 읽어도 배울 점과 생각할 점이 많다. 이 책은 그의 관상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담고 있는 아주 중요한 저작이니 머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꼭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은 The Inner Experience가 이미 두란노에서 전문번역가의 손을 거쳐《묵상의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아마도 개신교 독자들을 고려해서 그랬으리라 추측하지만)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를 묵상(meditation)으로 옮긴 것과, 글의 장(chapter) 순서를 바꾸어 출간한 것은 이 번역본의 큰 아쉬움이다. 어쨌든 당시 나와 동학(同學)들이 함께 한 거친 번역은 이제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내가 맡아서 번역한 부분 중 짧은 한 장을 거의 '날 것' 그대로 아래와 같이 이곳에 남겨 둔다. 혹시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 글을 접하게 된 분들 중에, 관심을 갖고 두란노 번역본이나 원서를 찾아서 읽게 될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13장 죄의식

The Sense of Sin

(Chapter 13 of The Inner Experience: Notes on Contemplation by Thomas Merton)


영적 해방으로 가는 첫걸음은 하나님 체험, 그 길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시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그 장애물은 바로 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실재이며, 아주 중대한 신비이다. 그 죄의 실재와 신비, 모두 인류가 접근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지금 인류는 그 죄에 깊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은 죄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통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비교적 해가 되지 않는 죄들에만 한해서 죄책감으로 정신을 잃는다. 이러한 현대인의 희망 없는 순결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비통한 미스테리들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종교적인 사람들조차 죄의 개념(the concept of sin)과 죄책감에 대한 이해(the notion of guilt)를 완전히 혼동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죄의 실재에 대한 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죄는 내적이고 영적인 실재이다. 실제적인 악이다. 사실은 유일한 실제적인 악이다. 죄는 모든 다른 악들이 부화하는 알(egg)이며, 죄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다른 눈에 띄는 악도 선으로 바뀔 수 있다.

(sin)죄책감(guilt)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죄책감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박감이며, 자신의 악행에 대해 설명하도록 소환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느끼는 불안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불안은 도덕적 소외의 신호이다. 그 불안은 우리가 그의 명령을 어겨온 주권자가 현존하여 우리에게 꾸지람하시는 것을 내면화할 때 우리 안에 활성화 된다. 그러므로 죄책감은 육체적 악, 거의 대부분은 도덕적 악에 대한 죄의식이다. “나는 죄가 있다”(I am guilty)는 내 생각에 어떤 다른 사람이 내가 잘못했다고 믿을 때에 하는 말이다. 만약 내가 그의 판단에 은밀히 동의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그 불일치를 느끼는 것조차 감히 하지 못한다면 나의 죄책감으로 인한 불안은 고조된다.

하지만 죄의식(sense of sin)은 깊고 보다 실존적인 무엇이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의 권위에 연관된 죄책의 느낌(sense of guilt)이 아니다. 죄의식은 내 안에 있는 악을 의식하는 것(sense of evil)이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의 밖에 있는 법을 어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의 존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법들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다. 그 법들은 동시에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법들이기도 하다. 죄의식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실재, 곧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깊이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짓되게 행했다는 의식이다. 죄는 극단적인 악이며, 영혼의 병이다. 사실 심각한 죄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영혼의 죽음이다. 죄의식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도덕적 죽음에는 차라리 나는 범죄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라는 죄책감이 엿보인다. 그러나 영적 죽음은 나 자신이 내면의 전적인 거짓으로 인해 진리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식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기심으로 인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식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려고 노력함으로 인해 진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은 나의 행위들을 성찰하고, 도덕법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존재론적이고 직접적인 무엇이다. 그것은 내 안에 현존하는 악으로부터 솟아나며, 그저 내가 잘못을 행했다(I have done wrong).’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철저히 잘못되었다(I am wrong, through and through).’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내가 거짓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영적인 자기 파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끔찍한 것은 우리의 육체는 단지 한 번 죽을 뿐이지만, 한 번 죽은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거듭거듭 반복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 가운데 거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지옥에서의 영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영구적이며, 영구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이다. - 사르트르(Sartre)탈출구는 없다 (No Exit).’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보라)

그러므로 죄의식은 대부분의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훈련해서, 그들이 속한 종파에서 금기로 된 일들을 범했을 때 경험하는, 잘못된 일을 했다는 켕기는 느낌보다 훨씬 깊고, 더 긴급한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통속적인 경건의 광신적인 면에 관한 비판적인 무언가가 있다. 악은 피하지만 선은 행하지 않고, 선한 것의 표시들만 만드는 사람들의 모든 공허한 행위들은 선한 의지들을 상징화한 몸짓들을 용납한다. 그리고 적당한 경건의 찌푸림으로 그들의 죄책감들을 완화시킨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은 빈틈없이 성실하게 수행되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낙관론의 올바른 단계를 수반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끔찍한 범죄들이 떨림 없이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은 집단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자(believer)’들의 대다수가 수소폭탄의 사용에 대해서 겨우 이론적으로만 희미하게 저항할 뿐, 수소폭탄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과 함께[각주:1]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거의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 되어 버렸다. 현재의 세상의 진술은 온 인류가 죄로 가득 찼다는 가장 명백하고, 적합한 징후이다. 이 죄의 책임은 더욱 더 집단적이 되고, 그래서 더욱 더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러시아나 히틀러의 독일처럼, 사회가 점점 더 전체주의화 되어갈수록, 그 사회 구성원 중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은 이미 알려졌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행동한다고 느끼는 한, 양심의 가책 없이 어떤 악(evil)이라도 행할 수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악은 바로 집단으로부터 잘려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집단은 그들의 죄악들을 떠맡아서 파괴해 버리기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은 최악의 재앙이다. 그래서 그룹으로부터 분리되는 약간의 징후만 있어도 불안과 죄책감이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 속에서 또는 영적인 것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상가의 소명과 사명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최소한 자신 안에 있는 사람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책임성과 집단적인 무책임으로부터의 개인적인 독립성을 육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가의 사명의 일부분은 이 세상에서 죄의식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 안에서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후손이 된다. 왜냐하면 죄의식이 살아있게 하는 것은 또한 선지자들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순간에 죄의 실재를 가지고 유대인들과 직면해야만 했다. 그 죄는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 법적인 의식으로써 회복될 수 있는 의식적인 죄(ritual guilt)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즐거운 소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려움 그 이상의 것이었고, 단순한 도덕적 설교보다 신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단지 공의와 자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받아들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그들의 패망과 바벨론제국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의 섭리는 심지어 예레미야도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권유하시는 하나님과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 사이에서 붙잡힌 것으로 여러 번 생각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개역개정판, 예레미야 20:7-9)

 

관상가는 야훼의 종과 같아서, ‘결점에 정통한사람이다. 그 결점은 자기 자신의 죄뿐만이 아니라 그가 책임을 떠맡은 온 세상의 죄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한 일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관상생활은 필수적으로 우리 세대의 죄악들에 의해 수정되어진다. 그 죄악들은 우리를 무지의 순수한 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어둠의 구름 위로 끌어 내린다. 그것은 온 세상 위로 떨어진 영혼의 어둔 밤이다. AuschwitzDachau, Solovky 그리고 Karaganda 시대의 관상은 교부들의 시대의 관상보다 어둡고 훨씬 무서운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적 빛이 있는 길을 찾으라는 권면이 죄에 대한 은근한 유혹이 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우리 세대의 짐을 공공연히 거부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비참을 공유하지 않기 위해 비실재와 영적 환상으로 도망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죄다.

오늘날의 관상생활은 반드시 깊은 슬픔과 참회, 그러나 순수한 슬픔과 치유와 삶을 바치는 회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 몇몇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관상생활은 반드시 17세기 경건의 바로크와 오페라의 슬픔 곧, 어두운 스페인의 교회들의 시대에, 열을 지어 호되게 비난하는 배경에 저항하여 엘 그레코[각주:2]가 그린 성자들의 눈물보다 훨씬 더 깊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빈곤의 깊이는 단조롭고 전혀 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단어들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욥보다 더 가난하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게 된 날을 저주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 삶은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화술이 없다. 우리는 혼잣말을 할 때도 욥의 친구들보다 더 말할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아마도 유대인들의 그 전적인 타락을 영적으로 공유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피골이 상접해서 아우슈비츠의 용광로 속에서 맞게 될 그들의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에서 살아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지금 충분히 가난하다. 그리고 우리의 빈곤은 영웅적이 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허락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허세의 부족, 곧 우리의 예배에서의 모든 열정의 부재는 우리 시대에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에는 우리 안에 또는 다른 이들 안에 경이를 일으킬만한 어떤 것에 대한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경이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짐승(the Apocalyptic Beast)의 기괴함 외에는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들과 기도에서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비워져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최고의 신비는 숨겨졌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는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곧 신들(gods)의 몰락이 그렇. 니체(Nietzsche)는 우리 세상을 대변하여 선포했다. 신은 죽었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관상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마치 죽은 듯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여져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관상의 진리는 이 안에 있다. 곧, 하나님께서 오늘날처럼 당신의 임재를 부재로 느끼도록 만드신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안에서 우리는 가장 신실하다. 즉, 우리는 어둠을 선호하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비움 분명한 부재를 존중한다. 만약 그분의 임재를 만들려는 노력이 헛수고라면 우리는 헛되게 그런 몸부림을 할 필요가 없다. (, nothingness)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 안에 그분께서 임재하신다.



Inner Experience : Notes on Contemplation

저자
Merton, Thomas/ Shannon, William H. (EDT)/ Shannon 지음
출판사
Harpercollins | 2004-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A final work by the late Trappist m...
가격비교



토머스 머튼의 묵상의 능력

저자
토머스 머튼 지음
출판사
두란노서원 | 2006-11-08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현대 영성의 아버지 토머스 머튼이 전하는 묵상의 진수 인생의 해...
가격비교


  1. 수소폭탄의 사용으로 인해 빚어지게 될 대량 학살과 파괴를 의미한다. (옮긴이 주) [본문으로]
  2.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그리스태생의 스페인종교 화가. 엘 그레코는 거의 모든 주요 성자들의 그림을 그렸는데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눈물을 흘리는 성 베드로 등과 같이 똑같은 구도를 되풀이해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옮긴이 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