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싹트는 발자국





출퇴근 시간, 환승역에 도착한 지하철 문이 열리면, 수많은 발걸음들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와 경쟁하듯 걸어갑니다. 오늘날 우리는 남들보다 빨리,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는 성찰의 귀중함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지난 발자국 


지난 하루를 되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사고(思考)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니,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 정현종


이 땅 위에 살며 인생길을 걷는 모든 존재는 발자국을 남깁니다. 모래벌판 위의 선명한 자국이든지, 보도블록 위의 보이지 않는 자국이든지 간에, 산다는 것은 곧 발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 시 〈지난 발자국〉에서 “발자국”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자취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돌아보는 지나온 삶의 순간들을 상징합니다. 


이 시의 화자는 아마도 저녁이나 밤에 자신이 살아온 “지난 하루를” 되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발자국부터 하나하나 되짚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이렇게 회상 속에서 하루 동안 자신이 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 겪었던 일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을 ‘길이 열리는 것’과 ‘강을 이루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사고(思考)”는 심상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합니다. 그저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깊은 ‘사고’는 튼튼한 “힘줄”이 있어 산만한 생각들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시인의 내면에 힘차게 길을 열어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느낌이 흘러 강을 이루고, 그 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집니다. 이렇게 이 시에서 “지난 발자국”을 되짚어 가는 과정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함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찰을 할 때 기억은 뒤로 돌아가지만, 성찰을 통해 열리는 길과 강은 마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성찰의 궁극적 목적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통합과 미래로의 희망찬 전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들을 다시 떠올려 그 의미와 느낌을 깊이 맛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쉬움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에 감사하게 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희망과 결단을 품게 합니다.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마음은 싹튼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무언가에 쫓기듯 앞으로만 내딛는 발걸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짓밟습니다. 그러나 하루의 끝자락에서 고요히 지난 발자국을 되짚어 가면, 그 발걸음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놀랍게도 우리의 마음이 싹틉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무심하게 지나간 주변의 사람들과 자연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마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고자 하는 용기 있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파릇파릇 싹틉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이 없는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진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수도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현대 생활의 분주함과 압박은 자신의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는 ‘폭력’이라고 말했나 봅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참회록〉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라고 노래했나 봅니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어두운 밤을 허락했나 봅니다.


Magazine Hub 50 (2017년 6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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