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흔(Stigmata)을 지닌 사람들 :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 

그리고 정호승의 〈거룩한 상처〉



1. 들어가며 : 인생의 상처, 상처의 종교


인생은 상처를 입고,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 잘리는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보드랍고 고운 아기의 얼굴에도 엄마도 아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만 손톱에 긁힌 상처가 나기 시작한다. 물론 아기의 생채기는 금방 아물지만, 이것을 시작을 우린 평생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그 흔적을 지니며 살아간다. 


그리스도교는 상처의 종교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상처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이들을 보듬는 종교다. 특히 사순절(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깊이 묵상하고,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마시는 때다. 예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상처를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거룩한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가 그를 따르는 사람의 몸에 나타난 것을 성흔(聖痕, stigmata)이라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στιγματα)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선언했고, 예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던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 곧 다섯 개의 상처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오늘날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바울의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성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흔이 상징하는 영적 가치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오늘 날 성흔을 묵상하는 것, 또는 성흔을 지니고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하여, 성흔에 관한 두 가지 자료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는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성흔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자료인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에 얽힌 이야기를 다룰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성흔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과 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다음으로 정호승 시인의 〈거룩한 상처〉를 분석할 것인데, 현대문학 작품인 이 시는 성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다. 


2. 특수한 성흔 : 사랑의 ‘다섯 상처’


성 프란체스코는 중세의 교회가 커다란 침체에 빠져 있던 1182년 무렵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여 기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극적인 과정을 거치며 회심한 뒤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그리고 그가 세운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는 탁발수도회 운동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열었고, 당시 침체된 교회에 거대한 활력을 불어 넣었다.  


프란체스코의 일생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그 중에 다른 성인들의 삶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이야기가 바로 그가 죽기 약 2년 전에 성흔을 받은 이야기다. 전기 기록자들에 의하면 1124년 9월 14일, 프란체스코는 베르나(La Verna)라고 불리는 은거처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홀연히 공중에 떠 있는 한 천사를 보게 되었다. 그 천사는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발과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동료 수사이자, 그의 전기를 최초로 기록한 첼라노의 토머스(Thomas of Celano: 1185-1265)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서,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그의 영혼은 그 환상으로부터 감각할 수 있는 의미를 분별하고자 매우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환상의 어떤 부분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였다. 그 환상의 새로움이 그의 마음을 매우 강하게 눌렀다. 그리고 그의 손과 발에 못 자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가 조금 전에 자신의 위에 떠있던 못 박힌 사람에게서 본 것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마치 창이 뚫고 지나간 것 같은 네모난 상흔이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끔 피가 흘러나와서 그의 겉옷과 속옷이 종종 그의 거룩한 피로 얼룩지기도 했다.[각주:1] 


첼라노의 토머스는 프란체스코에 대한 여러 편의 전기와 일화 등을 남겼는데, 여기서 번역하여 인용한 글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성 프란시스의 생애》의 한 구절이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최초의 자료가 일부 수정되고, 프란체스코의 성흔과 관련된 다른 기적들이 덧붙여졌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모두 문학 장르상 ‘성인전’(hagiography)에 해당하므로, 수록된 내용들의 역사적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성인전이란 객관적 사실의 전달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인물인지를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문학 형식이기 때문이다. 곧, 프란체스코의 성흔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성인전 기록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프란체스코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성흔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훌륭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 그는 자신이 받은 성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프란체스코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고, 전기 기록자들이 전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태도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첼라노의 토머스가 기록한 《성 프란시스의 생애》에 의하면,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성흔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을 훨씬 매력적인 인물로 보게 될까봐 자신의 상처를 숨겼다고 한다. 그래서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 성흔을 보거나 우연히 만질 수 있을 뿐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받은 성흔이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겼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의 마음에 새로움이 매우 큰 강도로 경험된 것을 고려하면, 프란체스코의 성흔은 그리스도와의 고난과의 연합하는 체험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놀라운 새로움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란체스코의 다섯 상처는 프란체스코 개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커다란 은총을 기억하게 하며, 그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된 내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프란체스코의 성흔은 그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주님의 사랑을 입은 거룩한 성인임을 증언하는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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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편적인 성흔 : ‘거룩한 상처’


그런데 특이하게도 정호승 시인은 그의 시 〈거룩한 상처〉에서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성흔은 어떤 특정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성흔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상처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성흔〉 전문.[각주:2]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본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한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음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본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묻는다.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 않은가(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는다.



4. 나오며


우리는 프란체스코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고, 때로는 신비적으로 경험하면서 그것을 통해 개인적으로 영적 새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에서와 같이 성흔을 보편적인 상처로 간주하는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흔을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은총으로 간주했던 프란체스코 또한, 자신의 아픔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았던 사실들을 생각한다면, 성흔을 특수한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보편적인 아픔으로 보든지 간에 일단 성흔을 깊이 묵상하고 지닌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4년 전 고난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작년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이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2018년 사순절, 오랜 나날 강요된 침묵 속에 괴로워했던 많은 상처들이 너도 나도 “미 투(Me too)”라고 말하며, 소리치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3월 31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팀블로그에 거룩한 상처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글을 확장하여 「좋은교회」 2018년 3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1. Thomas of Celano, The Life of Saint Francis, Book 2, III, 94. [본문으로]
  2.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