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회 | 온라인(www.praxis.or.kr), 2019년 6월 20일.
남기정의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과 칸트 이후 인식론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찬
권혁일
간혹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는다. 이처럼 하나님 인식과 관련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s)은 학문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목회적인 주제다. 남기정 박사는 목회자와 연구자로서 영적 감각론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천착해 왔다. 특히 그는 고대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Macarius of Egypt: 300-391)의 영적 감각론과 근대 영국 신학자 겸 목회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영적 감각론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남기정 박사가 오늘 발표한 짧은 소논문에 영적 감각에 대한 그의 많은 지식과 통찰을 압축해서 담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본 논찬에서는 발표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에 발표문에서 분량의 제한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내용들을 명료화하고 확대하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남기정 박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후의 현대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적 감각에 대한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그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발표자에 의하면, 본체(noumena)와 현상(phenomena)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칸트의 형이상학은 “지식과 탐구의 한계를 [육체적] 감각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신적 계시, 신성과의 대면과 연합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는 “신학과 영성분야에 커다란 허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칸트적인 분리는 서구의 17세기, 18세기의 지성적 활동을 종합한 것”이며, 현대 신(神)인식론적 딜레마를 고착시킨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발표자는 현대 신인식론의 주요한 두 축을 ‘로크주의적’(Lockean) 길과 ‘바르트적’(Barthian) 길로 분류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의 견해를 따라, 두 가지 길 모두 “신적 경험에 있어서, 신자들의 경험과 비신자들의 경험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신앙의 깊이 차이, 그들의 신과의 친밀함의 차이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신인식의 차이에 대해 의미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대 신인식론의 딜레마는 본체와 현상, 혹은 초월과 내재, 혹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상정하며, 주체의 특성과 잠재력을 간과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적시한다.
이러한 논의를 배경으로 남기정 박사는 사라 코클리가 초대 교부들의 영적 감각 사상을 바탕으로 제시한 현대 신인식론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들을 잣대로 존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이 이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은 통시적으로는 사막 교부 마카리우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공시적으로는 당대의 이성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웨슬리의 사상에서 “영적 감각이란 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인간의 감각”이다. “인간의 통상적 인식 능력이 실은 상당히 실추된(失墜~, deteriorated) 상태에 있어서, 현재의 인간의 인식은 물질계에만 국한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작용으로 영적 감각이 활성화”되어 인식 능력이 회복되면, 사람은 초자연적 세계, 신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한 “진정한 영적 경험을 위해서는 영혼의 정화와 성숙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발표자는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 즉 마음과 감각의 새로운 탄생, 변형, 진보, 정화를 강조하고 한 사람의 영적 여정에서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사상은 신적인 실재와의 소통과 대면과 연합의 경험을 말하는 영적 인식을 이해하는 약점을 보이던 현대 인식론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데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힘주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남기정 박사의 연구는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고, 그 가능성과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신자들과 목회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학회의 주제어인 ‘미디어 시대’는 감각적 즐거움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미디어의 발달과 확장이 어우려져 ‘눈에 보이는’(visible) 쾌락이 우상처럼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지배하는 때다. 이러한 때에 이성 또는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또는 ‘계몽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invisible) 신을 눈에 보이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으로 축소시켜 인간의 감각과 사고의 틀 속으로 쑤셔 넣으려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여전히 초월적 세계와 영적 감각을 주장하는 ‘고지식한’ 남기정 박사의 연구는 오늘날 눈에 보이는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들, 심지어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까지 ‘회심’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논찬자의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발표문에서는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이라는 주제를 붙인 것과 서론에서 “동영상 매체, 가상현실, 증강 현실까지 동원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이 사람들의 영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 것을 제외하고는 본문과 결론에서는 미디어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발표자는 연구의 목표를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고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 중에서도 현대의 신인식론과 웨슬리의 영적 감각론으로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였지만, 이와 같은 연구가 미디어 시대의 영성 생활에 주는 의의가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다음으로 발표자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영적 감각이란 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인간의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정의만 본다면 악의 영향력 아래서 “실추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인식 능력, 또는 감각은 영적 감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적 감각들의 깨어남과 성숙” 또는 정화와 활성화를 주장한 대목에서는 인간에게 영적 감각은 “새로운 탄생”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웨슬리는 인간에게 영적 감각은 언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지식이나 훈련을 통해 후천적으로 계발된 것인가?
아울러 발표자는 “웨슬리는 이러한 감각과 인식의 변형과 점진적인 발달과 성숙을 위해서는 신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성령과 협력하는 정화의 노력과 규칙에 따라 훈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아직 영적 감각의 깨어남·활성화·변형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식 능력이 실추된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신적인 것에 대해 헌신하고, 규칙에 따라 훈련하도록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복음의 선포나 교육을 통해 습득된 지식인가? 아니면, 그런 사람도 자신의 의지나 훈련과 관계가 없이 수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일종의 계시 사건, 또는 영적 경험을 부분적, 단편적으로라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 다른 말로, 영적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탄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영적 감각이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는데, 실추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영적 체험 또는 지식을 얻어서 회심하고 “새로운 탄생”을 경험할 수 있는가?
또한 남기정 박사는 웨슬리의 영적 감각 사상은 “칼빈의 divinitatis sensum과 같은 근대 초기의 정적(靜的, static) 영적 인식론과의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정론적 결정론과 대조적으로, 웨슬리는 영적 감각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모든 사람의 영적 감각은 새롭게 각성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웨슬리는 새롭게 깨어난 영적 감각은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깔뱅 연구자들 중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깔뱅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신적 감각/지각(divinitatis sensum, I.iii.1) 을 이야기한 것은 당대의 종교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변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모든 사람들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나 거부를 변명할 수 없음 논증하기 위해서다(롬 1:19; 2:14-15). 그래서 그는 영적 감각에 대한 사상을 정교하게 발전시키거나 설명하지는 않았다.
비록 신적 지각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본래적인 상태와 왜곡된 상태를 구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표자의 견해처럼 깔뱅이 “인간의 인식의 기능을 고정 불변한 것으로 간주”했다거나 순간적인 도약이 일어나는 분리적인 단계로 생각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깔뱅은 신적 지각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성향이 자라나는” “씨앗”과 같으며(I.iii.2), 그러한 “종교의 씨앗이 모든 사람 안에 신적으로 심기워졌음을 경험이 증명한다”(I.iv.1).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안에는 신적 지식의 씨앗이 처음부터 기이하게 심겨져있다(I.v.15). 씨앗이란 점진적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이다. 또한 깔뱅 신학에서 칭의를 통해 의롭다고 선언된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자라가야 한다. 곧,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논찬을 마치며, 영적 감각과 신인식론에 대한 좋은 연구로 배움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남기정 박사께 깊이 감사드린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주제는 학문적으로만이 아니라 목회적,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이므로, 이 주제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더욱 깊어지고 확장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