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금슬금 소리 없이



가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24절기에 따르면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는 보통 양력 8월 8일 전후로 있습니다. 입추가 되면 신기하게도 밤이나 새벽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양력 8월 23일 무렵에 있는 처서(處暑)를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지고 늦더위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달력이 9월로 넘어가면, “이제 드디어 가을이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완연한 가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진 지구온난화 탓이기도 하지만, 원래 가을이란 슬금슬금 오는 것이니까요. 

 

악견산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웃옷을 어깨 얹고 단추 고름 반쯤 풀고
사람 드문 벼랑길로 걸어 내린다
악견산 붉은 이마 설핏 가린 해
악견산 등줄기로 돋는 땀냄새
밤나무 밤 많은 가지를 툭 치면서 툭
어이 여기 밤나무 밤송이도 있군 중얼거린다


박태일의 시 〈가을 악견산〉의 시작 부분(1행-7행)입니다. 악견산(岳堅山)은 경남 합천에 솟아 있는 해발 634미터의 산입니다. 정상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암벽과 아름다운 꽃들이 어우러져 그 이름처럼 제법 높고 견고하며, 아름다운 곳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악견산을 의인화하여 “웃옷을 어깨에 얹고 단추 고름을 반쯤 풀고” 내려오는 사내로 묘사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내는 가을입니다. 마치 가을 단풍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점차 아래도 내려오듯이 “붉은 이마”의 악견산은 슬금슬금 능선을 타고 “어디 죄 지은 아이처럼 소리없이”(8행) 내려옵니다. 점차 물들어가는 단풍과 더불어, 밤송이도 익어 툭툭 떨어지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나락더미”가 쌓입니다(9행). 그러다 드디어 “… 음구월/ 시월도 나흘 더 넘겨서/ 악견산이 슬금슬금 마을로 들어서면/ 네모 굽다리밥상에는 속좋은 무가 채로” 오릅니다(12-15행).  

 

이처럼 악견산의 가을은 “슬금슬금”, “소리 없이” 내려옵니다. 달력은 구월로 넘어가도 여전히 늦더위를 쫓아내느라 부채질을 하는 이들에게 가을은 너무나 더디 오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도 악견산은 웃옷을 어깨에 얹고 등줄기에 땀을 흘리며 소리 없이 산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계절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추위나 더위가 얼른 지나가고 따뜻하거나 선선한 계절이 속히 오기를 바라지만, 겨울이나 여름은 때가 될 때까지 결코 물러가는 법이 없고, 봄이나 가을도 자신들의 때가 되기 전에 성급하게 등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조급한 건 자연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컴퓨터도, 통신도, 운송 수단도, 배달도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의 인내력은 점점 더 그 능력을 잃어갑니다. 그러한 인류에게 가을은 조급해하지 말고 나와 함께 슬금슬금 걸어보자고 청합니다.

 

〈가을 악견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어느 순간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걸어 내려온 악견산이 마을로 슬금슬금 들어서니, 이제 “나”가 마치 바통을 이어받은 듯 집 바깥이 궁금한 송아지처럼 사립문 밖으로 나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갑작스럽게 마무리됩니다.

 

덜미 잡힌 송아지같이 나는 눈만 껌벅거리며
자주 삽작 나서 들 너머 자갈밭 지나

악견산 빈 산 그림자를 밟아가다 후두둑
산이 날개 터는 소리에
놀라 논을 질러뛴다.

 

이것은 산 그림자에 덮인 논에 앉아있던 새가 갑자기 날개 치며 날아오르자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토끼나 어린 짐승이 놀라서 재빨리 도망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장 구조상 여기서 논을 가로질러 뛰는 주체는 시적 화자인 “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소리 없이 걸어온 가을에 어느새 완전히 동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독자들께서는 도시에 살고 있으시겠지요. 그래서 뒷산에 가을이 소리 없이 내려오는 것을 보기는 어려우시겠지만, 가을이 가로수길을 슬금슬금 걸어오는 것을 보신다면, 분주한 발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가을과 보조를 맞추어 슬금슬금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렇게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계절과 함께 소리 없이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을이 되어 마음이 익어가고, 아름답게 물들지도 모르니까요. 

 

Magazine Hub 113 (2022년 9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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