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곡은 어떠세요?” 

 

그녀가 내민 악보에는 “Liebster Jesu, Wir Sind Hier”(BWV 731)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음악에 별다른 조예가 없는 내게는 생소한 곡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해 보았더니 위키피디아에 곡에 대한 설명과 가사가 나와있었다. 재빠르게 훑어보고 대답했다.

 

“네, 권사님, 아주 좋은데요.”

 

필자가 섬기는 영락수련원에는 매주 화요일 낮 11시에 성찬이 포함된 정기예배가 있다. 이른바 ‘화요예배’이다. 보통 매년 3월 첫 주에 시작하여, 여름에 잠시 쉬었다가 11월 마지막주에 마친다. 그 중에서도 한 해의 마지막 화요예배는 좀 특별하게 드린다. 이때가 마침 대림절이 시작되는 즈음이기도 하여 마지막 예배는 ‘떼제 찬양으로 드리는 성탄목장식예배’로 드리고 있다. 올해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서 벌써 성탄목장식예배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

 

봉사자들이 창고에서 성탄 트리를 꺼내어 와서 예배실에 세우는 동안 수련원 반주자와 함께 작년에 사용했던 예배 순서지를 살펴보았다. 떼제 찬양 외에도 올해도 작년처럼 오르간 연주가 한 곡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하자, 반주자께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악보를 하나 내밀었다. 바흐의 프렐류드(Prelude)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곡은 원래 같은 제목을 가진 17세기 루터교 찬송을 편곡한 전주곡이다. 

 

원곡은 토비아스 클라우스니체어(Tobias Clausnitzer)가 1663년에 작시하였고, 그 이듬해에 요한 루돌프 알레(Johann Rudolph Ahle)가 곡을 붙였다. 이후 여러 찬송가집에 실렸으며, 또한 J. S.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곡조를 약간 단순화하여 4성부 합창곡으로 만들기도 하였고(BWV 373), 같은 곡조를 사용하여 코랄 프렐류드(BWV 706, 730, 731)로도 만들었다. 또한 그의 전주곡 모음집(Orgelbüchlein)에도 또 다른 프렐류드(BWV 633)와 변주곡(BWV 634)으로도 실려 있다. 원래 프렐류드가 즉흥 연주곡이었다고는 하지만, 바흐는 이 곡을 왜 그렇게 여러 번 다른 버전으로 연주했을까? 그만큼 원곡의 가사나 곡조가 그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래 클라우스니체어가 지은 찬송시는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로서 이 찬송은 주로 예배 시작 때나 설교 전에 불리어졌다고 한다. 독일어 가사를 한국어로 옮기면 이렇다. 

 

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님을 듣기 위해.

저희의 마음과 영혼을 이끄소서

기쁨 가득한 하늘의 가르침으로.

그래서 저희가 이 땅으로부터

주님께로 온전히 이끌리게 하소서. 

 

1절에는 이렇게 주님의 말씀 앞에 모여 주께 귀를 기울이니,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깨워 하늘의 가르침으로 이끌어 달라는 간구가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몸으로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종교개혁 전통의 예배에 나타나는 특징일 것이다. 라틴어로 미사를 진행하고 강론하던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찬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이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로 예배를 드리던 17세기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하늘의 기쁨이 가득한 말씀으로 자신들을 가르치셔서, 주님께로 온전히 이끌어 달라고 간구하였다. 비록 우리는 땅 위에 살고 있지만, 예배는 하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로 온전히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2. 

저희의 지식과 이해는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곳에는 당신의 성령의 손이 아직

명징한 빛으로 저희를 채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생각하고, 행하고, 쓰십시오.

주께서 이 일을 저희 안에서 하셔야 합니다.

 

이어서 2절에는 성령의 조명을 위한 구체적인 간구가 담겨져 있다. 먼저 시인은 우리의 지식과 이해가 가장 깊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그 어둠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한 줄기의 빛은 주님의 진리의 광선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령이시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님의 영이 채우시는 밝고 깨끗한 빛이 아직 없다. 아직 성령께서는 빛을 채워주지 않고 계시다. 이렇게 어둠이 깊으니 빛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께 촉구한다. 선한 일을 생각하고 행하여 달라고.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선한 일이 무엇인지는 논쟁의 여지 없이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의 빛으로 내면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이 일을 저희 안에서 하셔야 합니다.”라고 촉구한다.

 

3. 

오,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빛 중의 빛이신 주님,

저희 모두를 준비시켜 주소서.

저희의 마음과 입과 귀를 열어 주소서.

주 예수님, 

저희의 기도와 간구와 찬양을 들으시어

잘 되게 하소서.

 

드디어 3절에서 가장 밝고 찬란한 빛이 나타난다. 그 빛은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빛 중의 빛” 또는 “빛에서 나오신 빛”(Licht vom Licht)이신 주님이시다. 빛이신 주님의 등장과 더불어 찬송시는 이제 정점에 이른다. 이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은 주님께 이제 우리 모두를 준비시켜 달라고 청한다. 아마도 이것은 말씀을 들을 준비를 뜻할 것이다.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을 준비(마 25:1-13; 계 19:7)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시작할 때 불렀던 주님의 이름을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외친다. “주 예수님”이라고, 그 이름을 사랑과 확신을 담아 부르며,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와 간구와 찬양을 들으시어 성취되게 하시길(wohl gelingen) 기원하며 찬송을 끝낸다.

 

이 찬송시가 내 마음 깊은 곳을 휘저었다. 그것은 아마도 요즈음 개인적으로 내면의 어두움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유튜브에서 알레의 원곡과 바흐의 곡들을 찾아서 들었다. 원래 알레가 작곡한 회중 찬송은 밝고 경쾌한 느낌인데, 바흐의 프렐류드는 차분하면서도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듯하였다. 반주자께서 제안한 프렐류드(BWV 731)를 설교 전에 연주하도록 배치하고, 예배 순서지에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원곡의 가사도 번역해서 실었다. 그리고 누가복음 11장 34-36절을 읽고 “그대 안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몸의 등잔불은 그대의 눈입니다. 그대의 눈이 건강할 때는 온몸도 환합니다. 그러나 눈이 병들면 그대의 몸도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살피세요. 그대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 아닌지를요. 그러므로 그대의 온몸이 환하고 어두운 부분이 조금도 없으면 온통 환할 것입니다. 등잔불이 그대를 불빛으로 비추어 때처럼요누가복음 11:34-36 (새한글)

 

오늘날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가 어두운 것은 외부에 원인이 있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이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도 어두운 것처럼, 마음이 어두우면 그 삶도 어둡다. 이렇게 어두운 때는, 그래서 지금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는 때는 오히려 눈을 감고 가야한다. 일제강점기말 윤동주가 눈 감고 가라라는 시에서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라고 권한 것처럼, 어두운 시대에는 빛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가야 한다. 외부에서 빛을 찾으려 헛되이 애쓰기보다는, 눈을 감고 내면의 빛을 구하고 의지해서 가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예수여,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이 기도와 찬송을 이번 대림절 나의 기도와 찬송으로 삼으려 한다. 말씀 앞에 고요히 앉아,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이미 빛으로 존재하고 계신 주님을 향해 날마다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면 마구간과 같이 가난하고 지저분한 나의 내면에 환한 빛으로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월간 문화목회〉42(2023년 12월호), 24-28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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