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다 찌질한 이야기들뿐이에요.”
화장(火葬)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미망인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지금 불에 타 재가 되어 가고 있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간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그녀의 남편은 평생 연극배우로 살았다. 그리고 남자와 손을 잡고 입맞추면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줄로 생각했던 그녀는 평생 가난한 연극배우의 아내로 살아왔다. 고인(故人)은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국립극단 창단 멤버였으며, 연극계에서는 메소드 연기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던 원로배우였다. 60년이 훌쩍 넘는 생애를 연극과 뮤지컬과 영화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나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이 그렇듯이 가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생계는 오롯이 배우의 아내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요구르트 배달을 했어요. 그런데 그걸로는 아이들을 키우기가 어려워 조그만 손수레를 하나 장만하여 대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팔았습니다. 그러다 분식점을 내었고, 그게 좀 잘 되어서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건물 청소를 하고 있지요.”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단 몇 마디의 문장으로 요약하였다. 그리고 “찌질한 이야기”라고 스스로 제목을 붙였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지나온 세월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듯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회한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바로 위대한 이야기이지요.”
그녀의 짧은 이야기가 멈춘 것을 보고, 내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편해진 얼굴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때는 밥을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을 키울 수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족했어요.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더 바라는 것도 없었지요….”
그랬다.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 그것이 그녀의 인생 목표였다. 배우라는 천명(天命)을 받은 남편이 대본에 적힌 인생의 희로애락을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에, 아내는 그 희로애락을 자신의 삶으로 묵묵히 살아내었다. 고된 일,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그것으로 매일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나이 들어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고 자리에만 누워 있는 남편을 봉양하였다.
잠시 후 고인은 하얗게 타버린 유골로 가족들 앞으로 돌아왔고, 가족들은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분골을 안고 가서 그를 영락동산[1]에 안장하였다. 고인의 교구목사인 나는 마지막 자연장예식을 집례하며 이사야 26장 19절을 읽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그리고 〈부활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제 집사님께서 이 땅에서 부르시던 노래는 그쳤습니다. 또한, 여기 모인 우리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이 되면 집사님께서는 깨어 일어나 다시 노래하실 것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서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나온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새로운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기쁨과 감격으로 노래하실 것입니다.
장례의 모든 순서가 다 끝나고, 고인을 흙 속에 남겨둔 채, 유가족들과 함께 버스로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께서 생전에 이곳 영락동산에 많이 와 보셨을 텐데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곳에 묻히고 싶다고 ‘노래’를 했어요.”
남편의 그런 모습이 생각나는 듯 고인의 아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게 한 번 안아줄 수 있는지 묻고는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목사의 품에 잠시 안겼다. 가련한 유가족들의 머리 위의 가을 하늘은 파아랗게 높았고, 동산의 나무 앞사귀들은 가을바람에 노래하듯 산들거렸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날 밤 홀로 서재에 앉았는데, 낮에 미망인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다시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찌질한 이야기”라고 말했던 그 인생이 말이다. “찌질한 이야기”라는 말을 천천히 마음속으로 되뇌는데, 순간 한 사진이 그 이야기와 함께 오버랩되며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 사진은 며칠 전 사진 전시회에서 본 작품이다. 성우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시는 교회 집사님의 사진전이었는데, 아담한 갤러리에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비교적 촘촘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집사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분의 지인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마침 그녀는 뮤지컬 배우라고 하였다.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중에서도 한 건물 사진 앞에서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것은 크로아티아의 로빈(Rovinj)이라는 도시의 한 공동주택이었다.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조적식 건물의 중정(中庭)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인데, 사방의 벽들에 빼곡하게 달린 창문들은 그곳이 서민들이 모여 사는 공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톳빛의 벽들과 그 앞에 놓인 붉은 화분, 그리고 코발트색의 창문 덮개와 사각의 틀 속에 보이는 푸른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사진이 아름답게 보인 이유는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열린 창문들을 통해서 그곳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밖으로 들려 오는 듯했다. 그 이야기들은 아마도 특별할 것 없는 “찌질한 이야기”일 것이다. 먹고 사는 이야기,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가족들의 서로에 대한 애증이 묻어 있는 이야기…. 사진 속의 아파트 건물 안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 장례를 지낸 고인은 배우라서 그런지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은 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그의 부인은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나의 기억 속에 남은 그녀는 사진 속의 붉은 색 벽과 파란 창의 건물처럼 소박하고 아름답다. 그녀의 ‘찌질한’ 인생 이야기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울리며 그것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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