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받으면, 몇 번이고 꺼내어 다시 읽어보게 되는 편지가 있다. H 자매님의 편지가 그렇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직 마음이 살짝 들떠 있던 어느 날,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교회로 돌아가니 내 책상 위에 그림 엽서 세트와 함께 오렌지 색 편지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두툼한 봉투 안에는 네 장에 걸쳐 쓴 장문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장 마지막 줄에 가서야 H 자매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보기 전에 잘 익은 오렌지 같은 그 문장만 보아도 말투와 문체가 별로 다르지 않은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편지는 전시회를 다녀온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지난 겨울 끝자락에 친구와 모네 전시회를 보러 갔어요그런데 일반 작품 전시회가 아니라 디지털 전시회더라구요··· 사방 벽면이 갤러리고 관람객은 중간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보는 방식이더라고요그때   가슴이 두근 했어요그림 속에 파묻혀 그림을 본다는  얼마나 근사한지관람시간이 되기도 전에 가슴이 벅차 올랐어요 눈앞에 끌로드 모네의 〈양산을  여인〉이 펼쳐져 있었거든요털외투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벌벌 떨면서 전시회에 왔는데 〈양산을  여인〉을 보자 전시장에 봄이 가득   같았어요화가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하늘이  얼마나 순하고 맑던지다른 그림을 보지 않고 그저  그림 안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정도였어요생각해 보세요목사님향긋한 햇살이 어깨 위에 내려 낮고살랑살랑한 바람이 가슴에 스며드는데 어떻게 설레지 않을  있겠어요게다가  여인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으면  행복했었노라 말할  있겠다 싶을 정도로 아련하고도 애틋하게 그려졌잖아요. ··· 그렇게 모네의 “눈에 들어온 그대로의 색과 모양”들 속에서 “마음을 깨우는 형형색색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하니 마음에 한가득 바람을 머금고 있는  같았어요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  같았죠암튼 너무 좋았어요.

 

이전에 나도 디지털 그림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나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흐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이 입체적으로, 또는 동적으로 구현되어 있어 마치 판타지의 공간 속을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느낌이 살짝 들기도 했다. 그래서 편지 속에 기록된 H 자매님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내가 그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다니며 직접 경험했던 것보다 H 자매님의 글을 읽으며 더 깊은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편지와 함께 놓여 있던 작은 상자에는 끌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의 작품들이 인쇄된 엽서들이 들어 있었고, 상자의 앞면에서는 〈양산을 든 여인〉(Madame Monet and Her Son, 1875)과 그의 아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한동안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H 자매님이 본 것과 같이 그 그림이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파아란 하늘 위의 새하얀 새털 구름이 바람에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H 자매님이 아니라 내가 모네의 그림이 가득한 방 안에, 그녀의 표현을 좀 더 정확하게 인용하자면, “그림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사실 이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복음서 묵상’이었다. 기독교 영성 전통 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영성 훈련 중 ‘복음서 묵상’(Gospel contemplation)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복음서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나 자신을 등장 인물들 중 하나로 간주하여 직접 그 이야기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어린아이들도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본문을 하나 택하여 두세 번 반복해서 읽으며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 본다. 그렇게 해서 본문의 내용이 충분히 파악되면, 상상력을 활용해서 장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를 테면, 시각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저녁 무렵 빈들에서 자신을 찾아 몰려온 가여운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고치시기도 하는 예수님을 그려본다. 또한 청각적 상상력을 사용하여 들판에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수도 있다. 또는 촉각을 활용하여 바람을 느껴보아도 좋고, 후각을 활용하여 들판의 풀냄새를 맡아 보아도 좋다. 그리고 지각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장면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껴본다. 밝고 평화롭거나 기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우울하거나 어둡고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장면을 구성한 다음에는 이야기 속의 인물 중 하나가 되어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는 가능한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이 좋다. 곧, 많은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예수님 곁의 제자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는 소년이 되는 것이 예수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갖고 교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 원래 이야기 속의 소년과 달리, 주님께 자신이 가져온 물고기는 너무 작고 맛이 없는 것이어서 드리기가 민망하다며 주저하거나, 가진 것의 일부는 주머니에 감추어 두고 나머지만 드리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때의 상황과 마음 상태에 따라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많은 이들이 미술 작품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복음서의 이야기를 배우고, 묵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직접 읽거나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읽고 묵상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의 벽면에 걸리거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또는 벽면과 기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부조나 조각들 보면서 성경의 이야기와 관계를 맺고 그 속으로 들어가 묵상하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비슷하게 내가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 그림 속의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H 자매님이 편지에서 소개해 준 이 그림의 배경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모네의 첫 번째 아내로, 그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이래요. 재능은 있지만 가난했던 모네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지지해 준, 단 한 명의 우군이었죠.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모네는 물감을 살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해요. 정말 그런 것 같죠? 그림을 보면 아내와 아들에 대한 모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러한 이야기를 읽고서 다시 그림을 바라 보고 있으니, 유학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당시는 학비를 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어느 날 큰 마음을 먹고 저가형 DSLR 카메라를 중고로 하나 샀다. 그리고 산책을 다닐 때마다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석양이나 거리 풍경을 찍곤 하였다. 그것이 유학생활의 고달픔과 버거움을 잠시나마 흘려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그리고 그 때 찍은 사진 속에는 종종 아내가 있었다. 

 

그랬다.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 당시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아내가 나의 유일한 모델이었다. 그녀는 때로는 귀찮아 하면서도, 내가 요청할 때면 언제나 나의 모델이 되어,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절의 젊은 아내가 지금 ‘양산을 든 여인’이 되어 그림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과 함께 말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두 개의 장면이 오버랩되는 것처럼 ···.

 

H 자매님은 편지에서 봄이 되면 내가 아내와 아이와 함께 공원에라도 가서 그림과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네의 그림을 보낸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공원에 나가 봄을 누리기 위해 굳이 삼월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편지를 읽고, 그 “그림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동안 이미 봄이 와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사진 속에서 아내와 함께 웃고 있던 봄이, 지금 그림 속에서 되살아나 산듯한 봄바람으로 내게 불어 온다. 봄바람에 구름이 아득하게 흩어져 가고, 풀밭은 기분 좋게 출렁인다. 아내는 봄햇살에 눈을 살짝 찡그리며 사진을 빨리 찍으라고 재촉하고, 잠시 멈춰 서서 포즈를 잡아주던 아이는 이내 여기저기 즐겁게 뛰어 다닌다.

 


 

〈월간 문화목회〉44(2024년 2월호), 17-21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짙은 녹두색 글자로 된 두 문단은 원고 분량이 길어서 잡지에 송고할 때 삭제했던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