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찬양을 듣고 계신 것을 느꼈어요. 시간이 좀 지났지만,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살며시 미소를 띠고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지난 성 목요일에 드린 테네브레를 회상하는 듯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고난주간(성 주간)의 마지막 3(, , ) 중에 드리는 기도회이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테네브레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늦어도 9세기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니 그 역사가 천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원래 테네브레는 성 주간의 마지막 3일 동안 새벽 두세 시와 해뜰참에 드리던 수도원의 기도회(Martins, Lauds)였는데, 후기중세시대 이후부터는 교회에서 주로 오후나 저녁기도로 드려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성 주간의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저녁 중 하루를 택하여 드리기도 한다.

 

지난 2019년에 영락수련원에서 테네브레를 시작하며, ‘어두움’, ‘그림자를 뜻하는 라틴어 테네브레’(Tenebrae)암흑의 예전으로 번역하였다. 그것은 테네브레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이 봉독될 때마다 초들을 하나씩 끄다가 마지막에는 암흑 속에서 마치는 예전이기 때문이다. 성서 본문은 시편과 예레미야애가와 서신서 등에서 선택이 되는데, 개혁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의 말씀이나 마지막 만찬과 수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말씀들을 읽는 편이다. 특징적인 점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장면을 읽은 후에는 봉독자가 성경책을 힘껏 덮거나 발로 마룻바닥을 쿵 하고 굴리는 등의 방식으로 큰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소리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지진이 일어난 것을 상징하는데(27:51),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청각적 효과는 방금 봉독된 말씀에 시공간을 넘어선 현장성을 더해준다.

 

전통적인 형태의 테네브레는 산 모양으로 된 독특한 형태의 촛대에 열다섯 개의 초를 세워놓고 양쪽 끝에서부터 초를 하나씩 끄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의 개수나 배열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마지막 초가 꺼지면, 담당자가 그 초를 제단이나 커튼 뒤에 숨기거나 아예 예배실 밖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숨지신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지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며 참여자들은 마치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현재적인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는 성 금요일 예배 때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극적인 영상이나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네브레는 단순히 성서 말씀을 봉독하고, 찬송으로 응답하며, 보조적으로 어둠 속에서 단순한 상징들을 사용하지만 참여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수난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속에서 사건으로 경험하도록 초대한다.

 

영락수련원에서 성 목요일에 테네브레를 드린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목요일을 택한 이유는,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본교회에서 기도회가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목요일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날이어서, 영락수련원의 성 목요일 예배는 (1) 말씀의 예전, (2) 성찬의 예전, 그리고 (3) 암흑의 예전(테네브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 중 암흑의 예전은 테네브레의 핵심 개념과 특징들을 살리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구성하여 실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회중 찬송을 중요시한 개신교 전통을 살려 복음서 말씀 봉독 후 함께 부르는 찬송이나 악기 연주를 통해 말씀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원래 테네브레는 대부분의 순서들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우리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봉독자와 연주자로, 그리고 회중 찬송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매년 같은 형식이지만, 봉독되는 말씀과 음악과 예전 장식 등은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나는 올해 성 목요일 예배를 준비하며, 나 자신이 수련원의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이 일에 더욱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도 정말 바쁜 중에도 많은 정성을 들여서 예배를 기획하였고, 봉독과 연주를 맡은 이들도 각각 자신들이 맡은 바를 기도하며 성실히 준비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나는 이제 준비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나, 실력 있는 연주자나, 능숙한 봉독자도 실제 예배 가운데 은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전한 선물이다. 인간적인 기획과 노력들은 모두 장작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가운데서 장작과 같이 불태워져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올해도 우리가 준비한 장작을 모두 태우셨다. 아니, 우리가 준비한 장작은 고작 한 묶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큰 불을 일으키셨다. 비록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으나, 그 불로 인해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배하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함께 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서로 말로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서 내게 어둠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했다고 말씀하신 그 권사님께서 은혜를 나누어 주시기 전에도 그분에게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초들이 꺼지면, 테네브레도 끝난다. 각자가 어둠 속에 머물다가, 침묵 가운데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테네브레의 모든 시간들 중에서도 이 시간이 가장 좋다.

 

어둠은 빛의 결여다. 그래서 암흑은 공허이며, 어두움이 깊을수록 공허도 깊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흑암과 공허 속에서도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1:2). , 하나님은 암흑 속에서도 충만하게 현존하신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공허는 공허보다도 더 깊은 충만함이 된다.

 

그렇게 한동안 완전한 어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평화가 마음속에 깊이 배어든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53:5).


 

〈월간 문화목회〉47(2024년 5월호), 19-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시와 수필 > 문화목회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도회 초대장  (0) 2024.06.10
소리풍경 2  (0) 2024.04.08
소리풍경  (0) 202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