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예배

Dangerous Worship : A Reflection on My Worship 

 


예배는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예배를 통해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배자들이 그 말씀의 응답하여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혁명적이다. 인간의 허위와 악을 폭로하고 심령을 찔러 쪼개는 예리한 검이기 때문이다(4:12). 그리고 그 말씀에 제대로 응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이들의 삶이란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11:12). 급진적인 복음을 전파하고, 몸소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던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란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타적인 사랑과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래서 세상을 돈과 권력과 쾌락과 거짓의 나라로 만들려는 악한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참으로 위험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한국 교회의 예배가 다른 의미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전염병이 지역 사회로 확산되는 장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의 자리, 치유의 자리가 아니라 감염의 자리라는 말이다. 교회의 예배가 성도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회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도 감염시키는 위험한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빈번하게 장례식장, 결혼식장에도 가야하는 목회자들은 복음의 전파자나 치유자가 아니라 바이러스의 전파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많은 교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온라인 생중계로 예배를 드리던 지난 31일 아침, 이사야 1장 말씀이 생각나 찾아 읽었다.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 정신없이 널려 있는 제물은 다 무엇이냐?

번제물, 숫양, 포동포동한 송아지들,

나는 이미 질리도록 먹었다.

황소, 어린양, 염소들의 피도 지겹다.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짓들이냐?

누가 내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 짓 저 짓 벌이며

예배장소에서 이렇듯 소란을 피우라고 가르치더냐?

 

예배 시늉 놀이, 이제 그만 집어치워라.

같잖은 경건 놀음,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다.

달마다 열리는 회합,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 갖가지 특별 모임,

모임, 모임, 모임, 더는 못 참겠다!

이런저런 목적의 집회들, 나는 싫다!

정말 신물이 난다!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경건, 경건, 경건을 떠벌이는 너희가 지겹다.

이제 너희가 기도 쇼를 벌여도,

나는 외면할 것이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크게, 아무리 자주 기도해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너희가 사람을 찢어 발겼기 때문이다. 너희 손에 피가 흥건하다.

집에 가서 씻어라. 너희 행실을 씻어라.

너희 삶에서 악행을 깨끗이 씻어 내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하여라.

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말하여라.

선한 일을 배워 행하여라.

정의를 위해 일하여라.

낙오자들을 도와주어라.

집 없는 이들을 대변해 주어라.

힘없는 자들을 변호해 주어라.”

 

    - 이사야 1:11-20(메시지 예언서, 유진 피터슨, 이종태 역)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드리던 예배에 전혀 미련이 없으셨다. 오히려 예배에 신물이 나셨고,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들에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실까?

 

수 년 전, 유학을 다녀와서 특별히 소속된 교회가 없을 때에 주일이면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관점에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처럼 목사이면서, 유학까지 가서 공부를 오랫동안 했으며, 성격까지 까탈스러운 청중의 귀를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정말 설교자의 깊은 말씀 묵상과 주해(exegesis)에서 나온 설교가 아니라 자기 해석(eisegesis)에서 나온, 곧 자신의 경험과 관점으로 성경 본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설교들이 넘쳐났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하는 건지, 찬양을 인도하는 건지, 아니 쇼를 하는 건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기독교 TV 채널에서 본 한 대형교회의 예배 장면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당시 그 교회는 여러 가지 이슈로 교계 안팎에서 날카롭게 비판받고 있었는데, 크고 웅장한 예배당에서 담임목사의 인도로 영광의 주님”, “왕 되신 주를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과 분리된 높은 담장 안의 그들만의 왕국과도 같이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정말 기뻐하셨을까?

 

이 외에도 이후 약 5년 동안 여기저기에서 한국 교회를 다시 만나면서 목격한 장면들은 내게도 매우 상처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설교를 상습적으로 표절하여 목소리에 핏대를 높여 가며 외치는 설교자도 보았고, (내가 볼 땐) 가사와 별 상관없이 아궁이에 부채질하여 불을 지피듯 사람의 감정을 충동하는 2박자의 템포로 빠르게 박수를 유도하는 찬양인도자도 보았고, (역시, 내가 볼 땐) 성령의 인도와는 상관 없이 악기 소리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그저 크게 소리 지르는 기도인도자도 보았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 설교에 울고 웃고 아멘이라고 응답했으며,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노래했고, 목이 쉬도록 외치며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그 찬양과 기도를 어떻게 보셨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가? 설교자로, 예배인도자로, 예배자로 예배와 관련된 일들을 직업적으로 하며 살고 있는 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 예배자인가? 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간절한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 시대에 성전 종교에 종사하던 가야바나 다른 제사장들과 닮은 모습은 없는가? 또한 나는 설교자로 예배인도자로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자신의 죄악을 살피며 강단에 서왔던가? 조금도 아쉬움이나 부끄러움이 없는가? 있다. 아니, 많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슬퍼하는 이들이 많다. 당연히 슬픈 일이다. 너무나도 슬프고, 또 아쉽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슬픈 것은 예배가 영적, 도덕적인 면에서의 위험성을 상실했다는 점이지 않을까? 돈과 힘의 왕국을 견고하게 쌓아가려는 세상의 관점에서 예배가 더 이상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비통하게 여겨야 할 점이지 않을까?

 

지금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으로 인해 쟤네들 때문에라고 신천지를 손가락질하며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나의 예배를, 우리의 예배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어떤 특정 교회나 특정 인물을 비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배자로서의 나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우리 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해나가는 예배갱신운동이 이 참에 한국교회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위험한 예배가 회복되도록,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한국 사회 곳곳에서 그 말씀에 온전히 응답하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우리 함께 회개하고, 애쓰면 좋겠다. 교회가 이웃 사랑과 공적 책임을 위해 몇 주 동안만 잠정적으로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고 아예 스스로 교회 문을 닫아 버리시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말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미가 6:6-8

 

2020. 3. 5.

'바람소리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과 처음  (0) 2020.12.06
관계를 잇는 사람들  (0) 2020.02.11
'바닥'의 시대를 준비하자 (1)  (0)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