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보드게임이라네요. 목사님, 아이가 좋아하지 않을까요?”

 

프랑스 떼제(Taizé) 공동체를 떠나기 전 전시실”(Salle d’Exposition)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념품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상자 하나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정사각형의 황토색 종이 상자 위에는 켈리아”(Kellia)라는 제목과 함께 사막의 위험”(The Risk of the Desert)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었다. 순간 눈이 번쩍 크게 뜨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보드게임에 꽂혀 있는어린 아들에게 최적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2주 동안의 영성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선물 상자를 내밀자, 아이는 받아 들고서 연신 대박을 외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고난(?)이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게임 설명서가 영어와 독어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겨우 한글을 읽는 아이는 내게 게임 방법을 알려 달라고 졸라 대었다. 그러나 난 시차와 밀린 일들로 너무 피곤하여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다.

 

아빠가 내일 공부해서 알려 줄게.”

, 내일은 꼭 알려줘.”

 

그래도 착한 아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충혈된 눈으로 집에 돌아온 아빠를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난 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와 긴 설명서를 읽다가 꾸벅꾸벅 졸곤 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토요일 저녁 게임판을 펴 놓고 아들과 마주 앉았다.

 

켈리아는 여타 보드게임들과 게임 방식이 매우 달랐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참여자들이 경쟁하여 그 중에서 한 사람의 승자를 가리는 방식인데 반해, 켈리아는 게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협동해야 하는 게임(cooperative game)이었다. 이러한 낯선 방식 때문에 게임 규칙을 익히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기도 하다.

 

이 게임은 고대 이집트 사막의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4세기 초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자,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인들은 점차 세상과 타협하며 방종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이 진정한 신앙 생활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갔는데, 역사는 그들을 사막의 수도자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주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의 사막에 거주하면서 기도와 노동과 금욕의 삶을 살았다. 이들의 지도자들은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the desert fathers and mothers)이라고 불리며, 이들의 가르침과 삶을 모아 놓은 금언집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켈리아(Kellia 또는 Cellia)는 사막의 수도자들이 모여 살던 나일강 삼각지 서쪽에 위치한 마을들 중 하나이다. 원래 그리스어로 켈리아’(kellia)는 수도자들이 기거하던 독방, 또는 오두막을 뜻하는 켈리온’(kellion)의 복수형이다. 그래서 원래는 특별한 이름조차 없던 사막에 수도자들의 오두막들이 세워지면서, ‘켈리아’(오두막들)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기록과 발굴을 통해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을의 중앙에는 교회가 위치했고 그 주위에는 수도자들의 오두막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는데, 한 때는 약 600명의 수도자들이 모이면서, 켈리아는 직경이 6km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와 같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적 아버지(Abba)와 영적 어머니(Amma)의 지도 아래서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보통 각자의 오두막에서 홀로 기도하고 노동하였지만, 주기적으로 마을 중앙에 위치한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하였고, 생존 자체가 어려운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가진 자원들을 나누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보드게임 켈리아는 두 명에서 네 명의 수도자들(플레이어들)이 하루하루 생존하고, 주어진 기간 안에 각자의 켈리온(오두막)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수도자들은 내적 생활(기도), 자연묵상, 노동 등의 활동을 하는데, 중도에 한 사람이라도 매일 먹을 물과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전체가 게임에서 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많은 자원들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견제하고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임무를 함께 완수하기 위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소통해야 한다.

 

게임 방식이 생소하고, 규칙이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설명서에는 모든 카드들과 옵션들을 다 사용하는 버전(full version) 외에도 조금 단순화된 버전(introductory version)의 두 가지 게임 방법이 안내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간략한 버전을 익혀서 아이와 함께 해보았다. 원래 권장 연령 12세 이상의 게임이어서 어린 아들이 좀 어려워 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재미있어 하며 게임이 한 판 끝나자마자 곧바로 나를 재촉했다. “아빠, 어려운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지금 해보자!”

 

하지만 바쁜 아빠는 그로부터 또 일주일 가량이 지나서야 풀 버전의 게임 방법을 익힐 수 있었고, 기대에 가득 찬 아이는 이번에는 엄마도 불러서 셋이 함께 게임판 주위에 둘러 앉았다.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게임을 하니 서로 이기려고 경쟁할 필요도 없고, 졌다고 아쉬워 할 일도 없이 모두가 즐거웠다. 엄마는 아이가 오두막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고, 아이는 자신이 습득한 물과 음식을 아빠에게 나눠주며 뿌듯해 했다. 그것은 일종의 공동체 경험이었다. 이처럼 켈리아 참여자들은 게임을 통해 기도와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며,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경험한다. 이런 게임이라면 공동체가 함께 하는 영성 수련 중에 시간을 배정하여 함께 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설명서에 의하면, 켈리아는 떼제 공동체의 형제들이 만든 게임이다. 아마도 맨 처음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내었을 것이고, 공동체의 수사들과 그곳을 찾은 젊은이들이 함께 게임을 하며 조금씩 발전시켜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떼제 공동체 특유의 자유로운 소통과 영적 우정이라는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창의성과 협동심을 발휘하여 이런 게임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 게임에는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떼제 공동체의 영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드게임 켈리아는 떼제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자라고 맺힌 아름다운 열매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수도 공동체 떼제의 기념품 가게에서 보드게임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다. 오락(recreation) 또한 수도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 갈멜 수도회 소속의 영성가이자 개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Ávila: 1515-1582)는 공동체의 자매들이 우울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루 일과 중 기도 시간과 노동 시간은 물론 오락 시간도 배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캐스터네츠를 치거나 탬버린을 흔들며 자매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독방에서 엄격하게 침묵을 지키며 기도에 전념하는 카르투시오 수도회도 일주일에 한 번은 몇 시간씩 형제들이 함께 산책을 하며 즐겁게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오늘날 교회는 세속 문화를 경계하며, 교인들에게 세상의 오락과 유흥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저 금지만 할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대안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더욱 건강해야 한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는 법이다(7:17-18). 보드게임 켈리아는 그러한 일에 좋은 예가 된다. 이것은 이른바 갑툭튀’, 곧 한 사람의 머리에서 갑자기 툭 튀어 나온 산물이 아니라, 떼제라는 좋은 공동체에서 배태되고 자라난 즐거운 열매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떼제 찬양이 프랑스의 떼제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수도 공동체의 아름다움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월간 문화목회〉43(2024년 1월호), 20-23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