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때 교회에서 쓸 수 있는 영성 수련 프로그램 하나 잘 만들어 와~.”

 

유학 시절 잠시 귀국하였을 때 만난 신대원 동기 형은 내게 밥을 사주며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형의 애정 어린 조언은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그 말이 잊혀지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당시 내가 공부하고 있던 박사 과정 프로그램은 기독교 영성학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학문적 훈련을 하는 과정이어서 구체적인 영성 수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 웃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영성 수련은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작동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영성 수련()’라는 용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 매우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제목은 영성 수련()’인데 실제 내용은, 간단히 경건회를 드린 후 세미나나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등의 다른 활동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는 경우도 많다. 또는 참가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한 이벤트성이 짙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참가자들 모르게 가족들로부터 영상 편지나 손 편지를 받아서 보여 주거나, 아름다운 장식들과 수많은 초로 만든 하트 속에 서게 하거나, 관을 준비해서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죽음의 상황을 경험해 보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이런 수련회는 비밀 유지가 관건이다.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김이 새어버려감동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종 인위적인 기술들영업 비밀들로 진행되는 영성 수련회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나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그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흔히 기도는 능동적 기도수동적 기도가 있다고 말한다. 능동적 기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 추론, 상상 등과 같은 이성적 기능을 사용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드리는 일반적인 청원기도나 말씀묵상기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수동적 기도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노력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순전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추구하는 기도이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기도가 깊어질수록 능동성이 줄어들고 수동성이 늘어난다.

 

비슷하게 영성 수련에도 이러한 능동성과 수동성이 존재한다. 영성 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단연 기도이다. 강의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 수련 중의 강의는 기도를 안내하고, 돕기 위해서 제공된다. 또한, 소그룹 나눔이나 일대일 영성 지도 역시 수련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기도 체험을 잘 분별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갖기 위해 실시한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영락수련원에서 진행하는 영성 수련은 하루 세 번의 기도회를 그 기본 골격으로 한다. 강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수련을 시작할 때 기도에 대한 강의를 단 한 번만 하는데, 주로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는 방법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복음서 묵상’(Gospel Contemplation)을 소개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는 모든 수련자들이 함께 모여 인도자의 안내에 따라 기도하고, 그 사이에는 각자가 정해진 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 기도하게 되는데, 기도가 계속될수록 하나님과의 만남도 점점 깊어진다.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 단순한 노동을 하기도 하고, 여백의 시간에는 자연 묵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영성 지도자를 만나 기도 체험을 이야기하고 지도를 받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수련자는 영성 지도자와 함께 자신의 지난 기도를 되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누리게 되며, 다음 기도를 위한 실제적인 안내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성 수련에서는 영성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들에게 적절한 성서 본문을 선택하고, 그 본문으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잘 안내하며, 기도를 한 후에는 수련자들을 만나 기도 체험을 듣고, 그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나고 관계가 더욱 발전하도록 적절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성 지도는 성경 지식이 많거나,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두 가지도 필요하지만, 영성 지도자는 수련자의 기도 체험을 다루어야 하는 만큼 기독교 영성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영성 지도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성 수련의 요소들, 곧 기도회와 개인 기도, 그리고 기도를 돕기 위한 강의와 영성 지도, 또한 기도의 연장으로서의 노동과 자연 묵상 등의 프로그램들과 영성지도자라는 인적 요소는 수련자들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을 돕기 위한 요소일 뿐이다. 수련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러한 활동들을 하는 것은 능동적인 노력이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점점 자신의 노력들을 넘어서는 수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난 호에서도 테네브레를 소개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주체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수련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는 인간적인 기술과 방법으로 고안한 프로그램들이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앞서지 않도록 절제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들이 은혜받은 느낌을 갖게 하려는 조급함이나 강박으로 인해 사람의 감정을 손쉽게 움직이려는 이벤트적인 요소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그것보다는 성령께서 수련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세밀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수련 전반에 걸쳐 침묵의 분위를 조성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영락수련원의 영성 수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기도회나 예배 때 찬양을 하거나, 영성 지도자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수련자들은 수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침묵 가운데 지낸다. 식사도 침묵 가운데 홀로 하고, 잠도 독방에서 고독 가운데 혼자 잔다. 휴대폰도 꺼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한다.

 

그러므로 영성 수련은 원료를 투입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적인 공정(工程)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개방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활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받아들임은 수련을 마무리짓는 예배의 성찬식을 통해서 정점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명령하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받아서 먹고 마심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그리고 함께 수련에 참여한 형제자매들과의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의 통로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 수련에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들은 공연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 불과하다. 영성 지도자는 공연을 돕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 자리에 임하셔서 직접 춤을 추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영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추신다. 그러면 영혼은 그 손에 이끌려 함께 춤을 출 뿐이다. 그것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영혼이 함께 춤추는 혼인 잔치이자, 하나님 안에서 모든 창조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우주적인 춤이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한 대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 춤 한 가운데 있으며, 그 춤은 우리의 핏속에서 고동치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잊고, 우리의 끔찍한 엄숙함을 바람에 던져버리고, 그 보편적인 춤(general dance)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여전하다.”[1]

 

 


 

〈월간 문화목회〉48(2024년 6월호), 17-21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1]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Y: New Directions, 1962),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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