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를 그리다



우리말로 ‘해’라는 단어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가리키기도 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 곧 일 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 년이 지나가는 것을 종종 “한 해가 저문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굳이 지는 해를 보며 한 해의 마지막이나,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해가 저물어 가는 장면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심미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경험입니다. 매일 매일 다양한 빛깔과 모습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은 어떤 때는 매우 아름답게, 어떤 때는 매우 장엄하게, 또 어떤 때는 매우 설레거나 슬프게 우리의 마음을 물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석양을 보는 사람들도 각각 다른 것을 보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오규원 시인의 〈지는 해〉는 그런 장면을 마치 주홍빛 가득한 그림처럼, 또는 사진처럼 담고 있습니다.



지는 해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 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오규원, 〈지는 해〉 전문.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 시간적 배경은 해 질 녘입니다. 시의 화자인 ‘나’는 간이주점 근처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 사내”와 “여학생”과 “젊은 남녀 한 쌍”은 “각각” 따로 서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 인물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대화를 주고받지도 않지만, 이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인 “지는 해”와 그들을 바라보는 “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인생들이지만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시 안에 함께 담겨져 한 장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이 시는 제목 줄을 제외하고는 모두 13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가운데인 7행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를 기점으로 장면이 변합니다. 구체적으로 앞부분에 묘사된 장면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사진처럼 모두 멈추어 있지만, 뒷부분에 그려진 장면에서는 동영상처럼 각각 작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곧, 두 번째 장면에서는 마치 주점의 뒷문에 달린 창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숨겨진 내면을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살짝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인물들이 취한 동작의 의미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한 사내는 무엇이라고 중얼거렸을까요? 여학생은 왜 몸을 한 번 비틀었을까요? 젊은 남녀는 왜 서로를 보며 웃었을까요? 또 나는 왜 목덜미를 만졌을까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회한, 고통, 그리움, 애정, 아쉬움, 애처로움, 좌절감 등과 같은 감정들이 그들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동작들 속에서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개별 동작들이 갖고 있는 의미라기보다는 개별적인 등장인물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전체적인 분위기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올해 같은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풍경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각자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마치 강변 간이주점 옆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시인이 그리듯이 시야를 넓혀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나를 본다면, 우리는 내 옆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이웃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은 물론,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 살면서도, 또한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때”라는 1행의 첫 단어와 시 전반에 걸쳐 사용된 과거형 동사들은 시에 담긴 장면이 현재적 경험이 아니라 과거의 회상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리는 해 질 녘의 장면은 시적 화자가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다시 바라볼 정도로 매우 인상 깊은 또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올 한 해의 마지막이 오래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시길 바랍니다.


Magazine Hub 56 (2017년 1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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