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못의 사죄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떤 단체나 조직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른바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하다가 보면, 항상 윗사람의 말을 존중하도록 요구를 받지요. 윗사람의 지시에는 순응하고 토를 달지 않는 것, 그것이 어른을 존중하는 것이라 배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바라졌다’고 비난받거나, 조직 친화력이 없어서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제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에서 통용되는 ‘존중’이란 말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상향적인 태도나 행동이라는 개념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존중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전적으로 존중이란 단어는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높임을 받고 귀중하게 여겨지는 대상들은 굳이 따로 존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천대받거나 하찮게 취급받는 존재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존중입니다. 조직에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아랫사람들의 감정과 생각, 사회에서 힘이 없는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이 바로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을 받을 필요가 있는 대상들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낮은 것들을 존중하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시인은 조직체 속에서 권위에 순응하여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관료가 아니라 조직체 밖에서 조직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예언자의 후손입니다. 일제강점기, ‘대세’에 굴복하거나 순응하여 조선총독부라는 조직에 협력한 친일 시인들은 거짓 예언자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지만, 재야에서 펜을 칼과 같이 갈아서 글을 쓴 저항시인들은 성서의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하고 슬픈 현실에 주목하였습니다. 오늘날 시인들 중에도 그렇게 떨어지는 것들, 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시인의 북토크에 다녀왔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한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의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누군가가 질문했듯이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비, 1979)의 제목에도 역시 같은 단어 “슬픔”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인은 “내 시의 수원지는 비극”이며, “내 시의 스승은 고통의 현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우리 삶이 너무 비극적이예요.”라고 말하며,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대못〉이라는 시를 소개했습니다.


대못

인간의 가슴에 못 박히고 싶지 않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가슴에 못 박히고 싶지 않다
일찍이 청년 예수의 손발에 박혀
그의 어머니의 가슴에 깊이 못 박힌 일을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는데
인간의 가슴에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탕탕 나를 못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늙은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소리가
아흔 노모를 두고 일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늦은 밤 친구와 한강으로 놀러 간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어머니의 가슴에 못 박히는 소리가 소리 없이 들린다
사람들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면 나를 원망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슬픈 인간을 더욱더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만일 내가 지금도 당신의 가슴에 못 박혀 있다면 엎드려 사죄드린다
나는 당신의 가슴보다 흙바닥에서 흙과 함께 살길 원한다
비가 오면 빗길에 눈이 오면 눈길에 파묻히길 원하고
가끔 나무의 가슴에 못 박혀
인간의 집을 짓게 되길 바랄 뿐이다

- 정호승, 〈대못〉 전문.


따로 해설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이해하기 쉬운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 담긴 현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인은 우리 삶은 비극의 점철이지만, 그 비극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극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의 가슴에 박히는 “대못”의 목소리로, 비극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대못은 비극의 도구일 뿐, 비극을 일으키는 주체는 아닙니다. 대못은 어쩔 수 없이 머리에 망치질을 당하여 누군가의 가슴에 박힐 뿐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지금도 “당신의 가슴”, 곧 이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에 못박혀 있다면, 엎드려 사죄드린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정호승 시인은 비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과 상처를 주목하고 존중합니다. 높이어 귀중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의 마지막에는 대못이 진정 원하는 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못은 “당신의 가슴”에 못박히기보다 차라리 흙바닥과 빗길과 눈길에 파묻히길 원하고, 또는 “가끔 나무의 가슴에” 박혀, 이것도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어서 가끔씩만 그렇게 인간의 집을 짓게 되길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슬픔을 노래한 정호승의 작품들은 비극의 비바람을 맞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집을 지어 주려고 그가 종이 위에 망치질한 ‘대못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또 다른 비극이 어디선가 오늘도 내일도 일어납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있은 내 가슴에 박힌 대못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그 못으로 그래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집을 짓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못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통해서, 또 우리는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로와 희망의 집을 짓는 그 일에 손을 보태야 합니다. 그렇게 땅바닥에 쓰러진 이들의 슬픔과 상처를 존중하는 사람은 또한 하늘로부터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Magazine Hub 115 (2022년 11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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