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안는 너

 

 

우리는 지금 겨울로 가는 여행 중입니다. 머지않아 길가의 나무들은 찬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앙상한 가지들을 모두 다 드러낼 것이며, 인정 많은 눈송이들이 추위에 떠는 가지들을 포근하게 덮어줄 것입니다. 열대 지방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겨울로 가는 여행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겨울은 춥고 혹독한 계절이지만, 우리에게는 겨울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등굣길에 나서는 아이의 주머니에 어머니가 넣어주는 손난로나, 어둑어둑한 퇴근 시간 차가운 길거리에서 구수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군고구마와 군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외에도 나무가 헐벗은 겨울도 꽃이 피는 봄으로 만드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 “거짓말”을 한 번 들어 보시지요.

 

겨울 차창

너의 생각 가슴에 안으면
겨울도 봄이다
웃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
겨울도 꽃이 핀다

어쩌면 좋으냐
이러한 거짓말
이러한 거짓말이 아직도
나에게 유효하고
좋기만 한 것

 - 나태주, 〈겨울 차창〉, 1·2연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홍성사, 2020)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딸에게 보내는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집은 시인이 사랑하는 딸, 나민애 님을 생각하면서 쓴 시들을 모은 책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시를 의도적으로 ‘어렵게’ 쓰는 어떤 시인들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쉽게 씁니다. 대신 대놓고 “거짓말”을 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진실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 시적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말은 시인에게 유효하고 좋을 뿐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유효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많은 공감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시편들을 읽다가 보면 시인이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고 깊은지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랑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시 속에 나오는 딸이 시인의 딸,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딸들”임을 알게 됩니다. 실제 이 시집에는 25세 알제리 여성 “샤히라”를 비롯한 여러 딸들이 나옵니다. 나태주 시인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겐 이제 딸아이만 딸이 아니다. 세상 모든 예쁜 아이들은 다 딸이고 또 세상의 귀엽고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또한 모두가 딸이다. … 세상의 모든 딸들아. 살기가 힘드냐? 견뎌내기가 버겁냐? 그럴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하고 견뎌내야 한다. 너희들도 가슴속에 꿈꾸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품어보기 바란다. 다시금 너의 딸들을 사랑하기 바란다. 그러면 조금씩 견뎌지고 이겨내지고 끝내 꽃을 피워내는 날이 있기도 할 것이다.”

- 나태주, “책머리에: 딸아이 생각”,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 6-7.

 

이렇게 시인은 삶이 힘겨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너희들도 가슴속에 꿈꾸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품어보기 바란다.”고 애정을 담아 조언합니다. 이때 그 사랑스러운 것이란 다름 아닌 “너의 딸들”입니다. 그것은 시인이 그렇게 해서 힘겨운 인생길을 잘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겨울 차창〉에서 시인은 인생의 겨울에도 사랑하는 딸의 생각을 가슴에 안기만 해도, 그 마음에 웃고 있는 딸을 떠올리기만 해도 꽃이 피는 봄이 된다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딸아이”는 시인의 마음을 따뜻한 봄의 정원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인이 보는 겨울 차창 너머의 세계도 정겹게 만듭니다.  

 

지금은 이른 아침
청주 가는 길
차창 가에 자욱한 겨울 안개
안개 뒤에 옷 벗은
겨울나무들

왜 오늘따라 겨울 안개와
겨울나무가 저토록 정답고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냐.

 - 나태주, 〈겨울 차창〉, 3·4연

 

이렇게 이 시는 “왜 오늘따라 겨울 안개와 겨울나무가 저토록 정답고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답을 몰라서 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답은 1연에 다 나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답이 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독자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한 신문 인터뷰에서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 시는 굉장히 허술해요. 그래서 독자가 완성합니다. 무엇으로요? (공감의) 울음으로요. 시 ‘풀꽃’에도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한 줄을 더 넣어요. 그것이 보편입니다.”[1] 비슷하게 〈겨울 차창〉에서도 시인은 독자들이 “아, 나도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이 시를 완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곧, 독자들이 자신들도 누군가의 마음을 겨울에서 봄으로 바꾸는 “딸아이”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들의 소중한 “딸아이”를, 또는 “아들아이”를 마음에 안아 추운 겨울과 같은 힘겨운 삶을 견디어 내도록 응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겨울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에도 봄꽃을 피우는 “딸아이”가 있는 한 을씨년스러운 겨울 안개와 쓸쓸한 겨울 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경도 따스하고 정다운 세계로 바뀔 것입니다.


[1]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말 ‘네 뒤엔 내가 있단다’” (동아일보, 2020년 1월 15일).

 

 

Magazine Hub 116 (2022년 1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온라인에서 잡지를 보시거나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잡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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