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말 가까운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룹 영성지도 시간, 한 자매가 굵은 눈물 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이들도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는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기억에도 한 친구가 떠올랐다.
우리 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상당히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목회 현장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숫자가 아니라 눈물로 경험한다. 교인과 교인의 가족이나 친구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회자도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마 10:29), 그들의 자살 기도가 실패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추구하기보다, 먼저 문제를 안고 일상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기를 추구해야 한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자살생존자’라고 부른다. 그녀는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살 기도를 한 후 닷새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고, 가해자의 가족으로부터 “차라리 죽지, 왜 다시 깨어났느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돌아온 그녀를 환영해 주셨고, 그 사랑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이 깨어난 날을 생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홉 번째 ‘생일날’, 그녀는 교구목사인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함께 교구를 섬기는 전도사님과 함께 생일 케이크의 초를 밝히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성경에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인물들이 나온다. 욥은 비참한 재앙 가운데 “내가 태어난 날아, 사라져라. 내가 잉태된 그 밤아 없어져 버려라!”(욥 3:3, 메시지)고 절규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 또한 “내가 태어난 날이여, 저주 받아라!”(렘 20:14, 메시지)라고 극심한 고통 속에 부르짖었다. 이렇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저항 행위이다. ‘너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야.’ ‘네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 등과 같이 한 사람의 존재와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는 생각과 비난에 대한 생생한 저항이다.
20세기 미국의 트라피스회 수도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효용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현대 서구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역할에 달린 것이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가치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 새로운 품종의 씨앗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돌멩이나 생명이 없는 어떤 물질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아내는 아이가 없어서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결혼 13년만에 아이를 얻게 되었다. 불가능한 것 같아 이제 마음을 비우자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아이를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람의 노력이나 우연에 의해 존재하게 된 이가 없다는 진리를 깊이 절감하게 되었다. 부모가 계획하지 않은 아이, 부모가 원치 않은 아이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아이는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하나님께서 뜻하셔서 이 땅에 태어났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한 생명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녀는 내가 ‘생일’을 축하해 준 그 이후에도 많은 위기를 겪었다. 깊은 우울감과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였고, 한 번씩 찾아오는 자살 충동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다시는 자살을 기도(企圖)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고, 대신 기도(祈禱)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무력감과 절망감 등과 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까지도 모두 토로하였다. 어떤 때는 간신히 숨을 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죽음과 가까운 상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때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삶의 목표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그것은 자살 위기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간증을 담은 자작곡을 녹음하여 앨범으로 발매하고, 유튜브에 ‘사랑숲벤치’라는 채널을 만들었다. 사실 그녀는 이전에 같은 이름의 블로그를 몇 년 동안 홀로 운영하였으나, 어느 날 찾아온 깊은 내적 어둠으로 인해 블로그를 폐쇄한 적이 있다. 생명을 거부하는 죽음의 문화에 홀로 맞서기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그로기 상태가 되어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가, 이제 유튜브 채널 개설과 함께 다시 죽음의 문화와 싸우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같이 뒷걸음 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사랑 가득한 숲속 벤치’를 만들어 나갈 동역자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그녀를 함께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리며, 한 해 동안 간신히 이어왔던 부끄러운 연재를 갈무리한다.
〈월간 문화목회〉49(2024년 7-8월호), 16-19에 게재된 글을 옮겨놓는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남는 연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편집진과 독자들께는 죄송하지만 나의 깜냥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어서 이쯤에서 내려 놓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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