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9. 수. (2)


비행기는 다시 덴버에서 루이빌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 읽을 책으로 머튼의 The Sign of Jonas를 선택했다.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요나의 표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한국어 판을 챙겼다. 번역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여행 중에 사전 없이 읽기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 사실 머튼의 글, 특히 그의 일기와 같은 사적인 글들은 번역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는 종종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수도원 생활이나 가톨릭 전례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새나 꽃들의 이름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 또한 이 책은 1946년 12월부터 1952년 7월까지 머튼의 비교적 초기의 수도원 생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가 직접 살았던 수도원에서 열리는 이번 리트릿을 위한 최적의 '안내서'가 되리라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오륙 년이 넘었는데 주로 공부를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해서 읽었을 뿐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한국어로 남은 부분을 마저 읽어보리라 마음 먹고 비행기에서 잠 대신 책을 폈다. 


"니느웨로 가는 여행"이라는 제목을 단 프롤로그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일반적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침묵이 사방에 퍼져있다. 트라피스트 침묵은 그 장소의 돌들에도 침투해 있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흠뻑 적시고 있다." 머튼은 침묵을 사랑했다. 좀더 정확하게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사랑했다. 그 침묵이 단순히 '말의 부재'가 아니라 수도원을 공기처럼 채우고 있는 어떤 '실재'라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애니미즘(animism)이라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잔소리를 덧붙이자면, 돌들에도 침묵이 침투해 있다는 말은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만큼 침묵에 깊이 젖어 있으며, 침묵의 분위기가 수도원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 구절을 여러 번 곱씹으며 돌들까지도 침묵에 젖어 있는 겟세마니와의 만남을 상상해 보았다.


사실 침묵은 이번 여행의 동행자다. 평소에는 아내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붙어서 지내지만 이번 여행은 혼자서 가는 여행이다. 루이빌 공항의 렌터카 회사의 직원들과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름한 호텔 카운터의 무뚝뚝한 여직원이 오늘 내가 대화를 나눈 이들의 거의 전부이다. 아, 맞다. 아내가 있지! 그래도 아내와는 계속 전화를 주고 받는다. 주변이 지인들이 혼자 있는 아내를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마운 이웃들이다. 그러나 오늘 나의 이웃은 침묵이다. 평소에는 하루 중 한두 시간씩 주어지는 고독이 반갑지만, 오늘 홀로 먼 곳에 여행을 와 있으니 쓸쓸함이 몰려온다. 집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눅눅해진 바나나로 호텔방에서 저녁을 때우며 인터넷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여행을 떠나 오기 전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잡다한 일들을 하고 나니 벌씨 시간이 많이 되었다. 고작 세 시간이지만 시차 적응을 위해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은 일찍 머튼 센터에 가서 자료를 찾아 봐야 한다. 가져온 머튼의 일기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