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4. 월.


생각보다 빨리 이사하게 되었다. 일주일 후에 짐을 빼기로 했고, 자연히 텃밭 가꾸기도 마무리 해야할 때가 되었다.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텃밭에 나갔다. 최근 한 달 동안 비가 많이 와서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고, 밭에는 물이 고여서 논과 같이 된 곳들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많이 쏟았던 상추들은 달팽이들의 희생양이 되어 이제 그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잡초들과 달팽이 알만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겨울 작물이라는 부추과의 leak는 꾸준히 자라고 있어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브로콜리들이 달팽이들에게 잎을 먹혀 가면서도 어느새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었다. 3개월 전에 심었던 묘종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마치 간난 아기의 사진과 이삼십대의 장성한 청년의 사진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심은 브로콜리는 일반적으로 식료품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Broccoli Crown이 아니고, Broccoli Marathon이라는 품종인데, 그 이름처럼 지난 3개월 동안 참 오랫동안 끈질기게 달린 끝에 드디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사실 아무리 기다려도 잎만 커질 뿐 내가 아는 브로콜리 열매가 보이지 않아서, 브로콜리 마라톤이라는 품종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녀석들은 보란듯이 열매를 맺고 자신들이 '브로콜리'임을 당당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래, 나도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면 시간을 걸려도 내 정체성에 맞는 열매를 끝내는 맺게 되겠지. 마라톤과 같은 유학생활, 공부가 아직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매일 매일 하늘에서 주시는 물과 땅에서 주는 양분을 받아 먹고, 어려운 문제들이 생겨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 결국에는 주님과 이웃들과 내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되리라 희망을 가져 본다.


아직은 브로콜리 열매를 따먹기에는 좀 이른 느낌이 있어서 어떡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웃의 서연이네에게 아그들을 드리기로 하고 주변 정리만 좀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원예일기도 이제 끝이다. 언제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게 될까? 글쎄다. 보람도 있지만 생각보다 힘들다. 



브로콜리 마라톤 묘종 (2012. 9. 27)브로콜리 마라톤 열매 (2012. 12. 24.)